루이나 계승전쟁 Guerre de Succession Ruinaise War of the Ruinan Success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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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 |||||||||||||
1883년 3월 2일 ~ 1885년 2월 11일 | |||||||||||||
장소 | |||||||||||||
원인 | |||||||||||||
교전 세력 | |||||||||||||
은사슴단 (왕당파) 왕위수호동맹 남부 고지 방위군 루이나 육군 남부·서부 관구 | |||||||||||||
지휘관 | |||||||||||||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 (의회 의장) 에드거 몰리뉴 (해군 대장) 리처드 A. 손힐 (의회군 총사령관) 제임스 카버 (남부 고지 진격군 사령관) | 아델하이트 (왕비 · 실질 지도자) 가스파르 뮈롱 (자칭 제이머스 3세)[2] 오를레인 백작 (남부 고지 사령관) 라이너 폰 슈트라흐 (왕실 재무관) | ||||||||||||
전력 | |||||||||||||
약 11만 명 주력함 34척 | 약 8만 5천 명 주력함 2척[3] | ||||||||||||
결과 | |||||||||||||
벨포르 연합의 승리 | |||||||||||||
영향 | |||||||||||||
피해 규모 | |||||||||||||
의회파 전사 약 19,000명 부상 약 31,000명 주력함 3척 침몰 | 왕당파 전사 약 24,000명 부상 약 40,000명 지도부 11명 처형 유형 약 2,300명 | ||||||||||||
민간인 피해 | |||||||||||||
사망 약 17,000명[4] 남부 고지 인구의 약 9% 감소 | |||||||||||||
1. 개요 [편집]
1882년부터 1885년까지 루이나 연합왕국에서 벌어진 내전. 정식 명칭은 루이나 계승전쟁이나, 왕당파가 옹립한 인물의 본업 때문에 흔히 목수왕 전쟁으로 불린다.
3년에 걸친 내전으로 군인 약 4만 3천 명과 민간인 약 1만 7천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투가 아니라 봉쇄로 인한 아사와 동사였으며, 남부 고지는 인구의 9%를 잃고 한 세대가 지나도록 회복하지 못했다.
3년에 걸친 내전으로 군인 약 4만 3천 명과 민간인 약 1만 7천 명이 사망했다. 민간인 사망자의 대부분은 전투가 아니라 봉쇄로 인한 아사와 동사였으며, 남부 고지는 인구의 9%를 잃고 한 세대가 지나도록 회복하지 못했다.
2. 명칭 [편집]
3. 배경 [편집]
3.1. 벵골 상실과 왕실의 고립 [편집]
1871년 벵골 철수는 단순한 식민지 상실이 아니었다. 제국 재정과 무역 구조, 본국 산업 성장의 기반이 한꺼번에 흔들린 사건이었고,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후 십수 년간 루이나 정치를 지배했다.
책임론이 왕실로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858년 벵골 총독부가 직할 기구로 개편되면서 아멜리아 1세가 제(帝) 칭호를 받았고, 왕실은 그 칭호를 대외적으로 적극 활용해 왔다. 제국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만큼 제국의 상실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71년 철수와 함께 제 칭호가 폐지되었을 때, 신문들은 이를 두고 왕실이 13년 만에 빌려 온 옷을 벗었다고 썼다.
같은 시기 왕실은 대중 앞에서 물러나 있었다. 1865년 부군 알브레히트 폰 코부어를 잃은 아멜리아 1세는 이후 13년간 윈드미어 궁에 머물며 공식 석상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의회 개회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해가 이어졌고, 왕실의 공적 기능은 사실상 멈춰 있었다. 왕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제국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지게 되었다. 누가 책임을 지는가, 그리고 애초에 왕은 무엇을 하는가.
왕실 재정을 둘러싼 논란도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의회는 왕실비 심의 때마다 국왕이 수행하는 공무의 목록을 요구했고, 왕실이 제출한 자료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삭감을 관철한 사례가 1870년대에만 세 차례 있었다. 왕실은 이를 왕권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책임론이 왕실로 향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1858년 벵골 총독부가 직할 기구로 개편되면서 아멜리아 1세가 제(帝) 칭호를 받았고, 왕실은 그 칭호를 대외적으로 적극 활용해 왔다. 제국의 영광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던 만큼 제국의 상실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1871년 철수와 함께 제 칭호가 폐지되었을 때, 신문들은 이를 두고 왕실이 13년 만에 빌려 온 옷을 벗었다고 썼다.
같은 시기 왕실은 대중 앞에서 물러나 있었다. 1865년 부군 알브레히트 폰 코부어를 잃은 아멜리아 1세는 이후 13년간 윈드미어 궁에 머물며 공식 석상에 거의 나서지 않았다. 의회 개회식에도 참석하지 않는 해가 이어졌고, 왕실의 공적 기능은 사실상 멈춰 있었다. 왕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제국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두 가지 질문을 동시에 던지게 되었다. 누가 책임을 지는가, 그리고 애초에 왕은 무엇을 하는가.
왕실 재정을 둘러싼 논란도 이 시기에 본격화되었다. 의회는 왕실비 심의 때마다 국왕이 수행하는 공무의 목록을 요구했고, 왕실이 제출한 자료가 부실하다는 이유로 삭감을 관철한 사례가 1870년대에만 세 차례 있었다. 왕실은 이를 왕권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였으나, 대중의 반응은 대체로 냉담했다.
3.2. 에드먼드 3세의 계승 문제 [편집]
1878년 12월 아멜리아 1세가 사망하고 아들 에드먼드 3세가 즉위했다. 그는 1841년에 태어나 출생과 동시에 왕위 계승자가 되었고, 어머니가 38년을 재위한 탓에 서른일곱에야 왕태자 자리를 벗어났다. 즉위 당시 이미 37년 1개월을 기다린 뒤였다.
문제는 그에게 자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1867년 대륙 하르슈타트 공가의 아델하이트와 혼인했으나 15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는 궁정 안에서만 아는 일이 아니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신문들은 왕태자 부부의 후계 문제를 공공연히 다루었고, 왕비에게 책임을 돌리는 논조가 일반적이었다.
즉위 이후 문제는 더 급해졌다. 국왕은 마흔에 가까웠고 왕비는 서른둘이었다. 의회 안에서는 계승 순위를 미리 법으로 확정해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왕실은 이를 국왕의 생식 능력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처사로 받아들여 강하게 반발했다. 1880년과 1881년 두 차례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가 모두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철회되었다.
결과적으로 1882년 4월 국왕이 급사했을 때, 이 나라에는 다음 왕이 누구인지를 정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15년간 알려져 있었으나 왕실도 의회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문제는 그에게 자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1867년 대륙 하르슈타트 공가의 아델하이트와 혼인했으나 15년이 지나도록 후사를 보지 못했다. 이는 궁정 안에서만 아는 일이 아니었다. 1870년대 후반부터 신문들은 왕태자 부부의 후계 문제를 공공연히 다루었고, 왕비에게 책임을 돌리는 논조가 일반적이었다.
즉위 이후 문제는 더 급해졌다. 국왕은 마흔에 가까웠고 왕비는 서른둘이었다. 의회 안에서는 계승 순위를 미리 법으로 확정해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왕실은 이를 국왕의 생식 능력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처사로 받아들여 강하게 반발했다. 1880년과 1881년 두 차례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가 모두 심의조차 되지 못한 채 철회되었다.
결과적으로 1882년 4월 국왕이 급사했을 때, 이 나라에는 다음 왕이 누구인지를 정한 문서가 존재하지 않았다. 후사가 없다는 사실은 15년간 알려져 있었으나 왕실도 의회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3.3. 린데나우가 방계의 사정 [편집]
계승법상 다음 순위는 대륙에 흩어진 린데나우가 분가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왕위를 이을 만한 조건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첫째, 관계가 너무 옅었다. 1716년 게오르크 1세가 즉위한 이래 166년이 지났고, 그사이 본가는 세 차례에 걸쳐 대륙 영지와의 연결을 정리했다. 1806년 선제후국이 소멸한 뒤로는 명목상의 칭호만 남았으며, 방계 인사들 가운데 루이나에 거주하거나 루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둘째, 순위 자체가 불분명했다. 게오르크 3세가 자녀를 열다섯 두었고 그중 열셋이 성년에 이르렀던 만큼 후손은 많았으나, 여계 계승과 대륙 귀족과의 혼인이 얽히면서 순위 계산은 법률가마다 결론이 달랐다. 1882년 여름 왕실 법률고문단이 제출한 보고서는 유력한 후보 네 명을 들었는데, 그 네 명의 순서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였다.
셋째, 의회 안에 지지 기반이 없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루이나 정계와 접촉을 유지하지 않았고, 몇몇은 계승 의사조차 밝히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 인물은 대륙에서 이미 다른 공국의 계승자였으며, 두 자리를 겸하는 데 따르는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사실상 사양했다.
이 공백이 아델하이트가 움직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방계 계승이 순조로웠다면 왕비가 다른 계보를 꺼낼 여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첫째, 관계가 너무 옅었다. 1716년 게오르크 1세가 즉위한 이래 166년이 지났고, 그사이 본가는 세 차례에 걸쳐 대륙 영지와의 연결을 정리했다. 1806년 선제후국이 소멸한 뒤로는 명목상의 칭호만 남았으며, 방계 인사들 가운데 루이나에 거주하거나 루이나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둘째, 순위 자체가 불분명했다. 게오르크 3세가 자녀를 열다섯 두었고 그중 열셋이 성년에 이르렀던 만큼 후손은 많았으나, 여계 계승과 대륙 귀족과의 혼인이 얽히면서 순위 계산은 법률가마다 결론이 달랐다. 1882년 여름 왕실 법률고문단이 제출한 보고서는 유력한 후보 네 명을 들었는데, 그 네 명의 순서조차 확정하지 못한 채였다.
셋째, 의회 안에 지지 기반이 없었다. 이들 가운데 누구도 루이나 정계와 접촉을 유지하지 않았고, 몇몇은 계승 의사조차 밝히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 인물은 대륙에서 이미 다른 공국의 계승자였으며, 두 자리를 겸하는 데 따르는 외교적 부담을 이유로 사실상 사양했다.
이 공백이 아델하이트가 움직일 수 있었던 조건이었다. 방계 계승이 순조로웠다면 왕비가 다른 계보를 꺼낼 여지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3.4. 공화파의 대두 [편집]
같은 시기 루이나 사회에는 왕정 자체를 문제 삼는 흐름이 자라나고 있었다.
공화주의는 1647년 카렐 1세 처형과 호국공 체제의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1832년 선거법 이후 확대된 유권자층은 왕실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산업 도시의 노동 운동과 비국교회 교단은 세습 권력 일반에 비판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멜리아 1세의 13년 은둔이 결정적이었다. 왕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라가 굴러갔다는 사실 자체가 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 중반부터 벨포르와 내해 연안 도시들에서 공화파 단체가 잇따라 결성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온건했다. 왕정을 당장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왕실비를 삭감하고 왕실의 정치적 특권을 정리하자는 수준이었으며, 지지층도 도시 중산층과 숙련 노동자에 국한되어 있었다. 1880년 총선에서 공화파 성향을 공언한 후보가 얻은 의석은 열두 석에 그쳤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의 틀은 중요했다. 왕정이 계약의 산물이며 계약인 이상 조건을 따질 수 있다는 주장,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가 왕위를 부여한 것이므로 부여한 쪽이 조건을 정할 수 있다는 논리는 이 시기 공화파 소책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1885년 의회가 왕위를 폐지하며 내세운 논거는 이때 이미 인쇄물의 형태로 유통되고 있었다.
정작 공화파는 계승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쟁을 이끈 것은 벨포르 연합의 온건파 의원들이었고, 이들 다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새 왕을 세우는 쪽을 상정하고 있었다. 왕정이 실제로 폐지된 것은 3년간의 내전이 왕당파뿐 아니라 왕정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결과였지, 공화파의 계획이 관철된 결과는 아니었다.
공화주의는 1647년 카렐 1세 처형과 호국공 체제의 기억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에 가까웠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1832년 선거법 이후 확대된 유권자층은 왕실을 신성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고, 산업 도시의 노동 운동과 비국교회 교단은 세습 권력 일반에 비판적이었다. 무엇보다 아멜리아 1세의 13년 은둔이 결정적이었다. 왕이 보이지 않는 동안에도 나라가 굴러갔다는 사실 자체가 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 중반부터 벨포르와 내해 연안 도시들에서 공화파 단체가 잇따라 결성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대체로 온건했다. 왕정을 당장 폐지하자는 것이 아니라 왕실비를 삭감하고 왕실의 정치적 특권을 정리하자는 수준이었으며, 지지층도 도시 중산층과 숙련 노동자에 국한되어 있었다. 1880년 총선에서 공화파 성향을 공언한 후보가 얻은 의석은 열두 석에 그쳤다.
그러나 이들이 만들어 놓은 담론의 틀은 중요했다. 왕정이 계약의 산물이며 계약인 이상 조건을 따질 수 있다는 주장,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가 왕위를 부여한 것이므로 부여한 쪽이 조건을 정할 수 있다는 논리는 이 시기 공화파 소책자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1885년 의회가 왕위를 폐지하며 내세운 논거는 이때 이미 인쇄물의 형태로 유통되고 있었다.
정작 공화파는 계승전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쟁을 이끈 것은 벨포르 연합의 온건파 의원들이었고, 이들 다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새 왕을 세우는 쪽을 상정하고 있었다. 왕정이 실제로 폐지된 것은 3년간의 내전이 왕당파뿐 아니라 왕정이라는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결과였지, 공화파의 계획이 관철된 결과는 아니었다.
4. 계승 위기 [편집]
4.1. 1882년 4월, 국왕의 급사 [편집]
1882년 4월 7일, 에드먼드 3세는 윈드미어 왕실 사냥터에서 낙마했다. 처음 전해진 보고는 경상이었다. 국왕은 자력으로 걸어 마차에 올랐고, 그날 저녁 왕궁에서 평소대로 만찬을 들었다.
이틀 뒤부터 상태가 나빠졌다. 왕실 주치의는 늑골 골절에 따른 폐 손상으로 진단했으나, 4월 12일 이후로는 고열이 계속되었다. 4월 15일 밤 왕실은 국왕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표했고, 이틀 뒤인 4월 17일 새벽 국왕이 사망했다. 향년 40세, 재위 3년 4개월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몇 시간에 있었다. 관례상 국왕이 사망하면 즉시 계승자의 이름이 선포되고 추밀원이 소집된다. 그러나 이날 새벽 왕궁에서 선포된 이름은 없었다. 추밀원 서기가 관례에 따라 계승 선포문의 서식을 가져왔을 때, 채워 넣을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
의회는 그날 오전 긴급 소집되었다. 오후에 통과된 결의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계승자가 확정될 때까지 국정은 기존 내각이 대행한다. 둘째, 계승 문제를 심의하기 위한 왕위계승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결의는 왕위가 비었다는 사실을 공식 문서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고, 훗날 왕당파는 바로 이 결의를 의회가 처음부터 왕정을 끝낼 뜻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로 인용하게 된다.
이틀 뒤부터 상태가 나빠졌다. 왕실 주치의는 늑골 골절에 따른 폐 손상으로 진단했으나, 4월 12일 이후로는 고열이 계속되었다. 4월 15일 밤 왕실은 국왕이 위중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표했고, 이틀 뒤인 4월 17일 새벽 국왕이 사망했다. 향년 40세, 재위 3년 4개월이었다.
문제는 그다음 몇 시간에 있었다. 관례상 국왕이 사망하면 즉시 계승자의 이름이 선포되고 추밀원이 소집된다. 그러나 이날 새벽 왕궁에서 선포된 이름은 없었다. 추밀원 서기가 관례에 따라 계승 선포문의 서식을 가져왔을 때, 채워 넣을 이름을 아는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
의회는 그날 오전 긴급 소집되었다. 오후에 통과된 결의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계승자가 확정될 때까지 국정은 기존 내각이 대행한다. 둘째, 계승 문제를 심의하기 위한 왕위계승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 이 결의는 왕위가 비었다는 사실을 공식 문서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고, 훗날 왕당파는 바로 이 결의를 의회가 처음부터 왕정을 끝낼 뜻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로 인용하게 된다.
4.2. 계승 논의의 교착 [편집]
왕위계승특별위원회는 4월 20일 첫 회의를 열었다. 위원 21명 가운데 왕실 법률고문 3명이 포함되었고, 왕비 아델하이트는 옵서버 자격으로 출석할 권리를 요구했으나 위원회는 이를 부결했다. 국왕의 배우자는 계승 순위에 있지 않으므로 이해관계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왕비가 이후 위원회를 신뢰하지 않게 된 첫 계기였다.
위원회가 근거로 삼은 법은 세 가지였다.
위원회가 근거로 삼은 법은 세 가지였다.
- 왕위 계승 순위 확인법 (1801) — 여계 계승과 대륙 귀족과의 혼인에 따른 순위 산정 방식을 규정한 법. 다만 조항이 모호해 해석이 갈렸다.
- 합병법 (1709) — 남부 고지 대공위가 왕위에 흡수되었음을 규정. 대공위를 별도로 계승할 수 없다는 근거로 원용되었다.
6월 14일 위원회가 제출한 1차 보고서는 유력 후보 네 명을 열거했으나 순위를 확정하지 못했다. 여계를 통한 계승권이 남계와 동순위인지 후순위인지에 대해 1801년 법의 해석이 갈렸기 때문이다. 위원회는 이 쟁점을 대법원에 이송할 것을 권고했고, 대법원은 8월 3일 "계승 순위는 법률 해석이 아니라 입법의 문제"라며 심리를 거부했다.
이송이 막히자 논의는 다시 의회로 돌아왔다. 9월과 10월에 걸쳐 계승 순위를 새로 정하는 법안이 세 건 발의되었으나 어느 것도 과반을 얻지 못했다. 후보 네 명 가운데 두 명은 계승 의사를 밝히지 않았고, 가장 유력하다고 평가된 인물은 10월 말 서면으로 사실상 사양의 뜻을 전해 왔다.
그해 가을 벨포르에서는 왕위가 비어 있다는 상태가 이미 여섯 달을 넘겼다는 사실 자체가 논점이 되기 시작했다. 나라가 왕 없이도 굴러가고 있다는 관찰은 공화파 소책자의 단골 소재가 되었으며, 왕당파는 이 공백을 하루빨리 메우지 않으면 왕정 자체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했다.
4.3. 뮈롱 계보의 발견 [편집]
아델하이트가 다른 계보를 찾기 시작한 시점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1882년 8월 그가 친정인 하르슈타트 공가에 서신을 보내 가문이 보관한 혼인 기록의 사본을 요청한 사실은 확인된다.
하르슈타트 공가는 영토가 작았으나 유럽 각지의 왕실과 촘촘하게 혼맥을 맺고 있었고, 계보 기록에 관한 한 대륙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이 집안은 18세기에 제이머스 2세 망명 계열과 혼인한 적이 있었다. 1689년 왕위협약으로 폐위된 뒤 대륙으로 건너간 그 계열은 1745년 봉기가 글렌모어 전투에서 진압되면서 후원자를 잃었고, 두 세대 만에 궁정에서 밀려나 뮈롱이라는 평민 성을 쓰며 항구 도시의 장인 집안이 되어 있었다.
왕비의 법률 자문들이 주목한 것은 왕위협약의 문언이었다. 1689년 의회는 제이머스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국왕이 통치를 포기하고 왕위를 비웠다는 법리를 택했고, 그 결과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해 처형한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이었으나, 193년 뒤 그 신중함이 빈틈으로 돌아온 것이다.
개신교 계승법이 남아 있었으나 이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이 법은 가톨릭 신자를 배제할 뿐 그 후손이 개신교로 개종한 경우를 명시하지 않았다. 뮈롱가는 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미 3대 전에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왕비 측에게도 유리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왕비의 자문들은 개종 서약을 조건으로 걸면 이 장애를 넘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82년 10월, 하르슈타트에서 파견된 조사원이 벨덴 조선소에서 일하던 가스파르 뮈롱 을 찾아냈다. 당시 마흔셋이었고,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스물여덟 해째 선박 목수로 일하고 있었으며, 자녀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루이나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하르슈타트 공가는 영토가 작았으나 유럽 각지의 왕실과 촘촘하게 혼맥을 맺고 있었고, 계보 기록에 관한 한 대륙에서 손꼽히는 집안이었다. 이 집안은 18세기에 제이머스 2세 망명 계열과 혼인한 적이 있었다. 1689년 왕위협약으로 폐위된 뒤 대륙으로 건너간 그 계열은 1745년 봉기가 글렌모어 전투에서 진압되면서 후원자를 잃었고, 두 세대 만에 궁정에서 밀려나 뮈롱이라는 평민 성을 쓰며 항구 도시의 장인 집안이 되어 있었다.
왕비의 법률 자문들이 주목한 것은 왕위협약의 문언이었다. 1689년 의회는 제이머스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국왕이 통치를 포기하고 왕위를 비웠다는 법리를 택했고, 그 결과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조항이 존재하지 않았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해 처형한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이었으나, 193년 뒤 그 신중함이 빈틈으로 돌아온 것이다.
개신교 계승법이 남아 있었으나 이 역시 완전하지 않았다. 이 법은 가톨릭 신자를 배제할 뿐 그 후손이 개신교로 개종한 경우를 명시하지 않았다. 뮈롱가는 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미 3대 전에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왕비 측에게도 유리한 사실은 아니었으나, 왕비의 자문들은 개종 서약을 조건으로 걸면 이 장애를 넘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1882년 10월, 하르슈타트에서 파견된 조사원이 벨덴 조선소에서 일하던 가스파르 뮈롱 을 찾아냈다. 당시 마흔셋이었고, 아버지의 일을 물려받아 스물여덟 해째 선박 목수로 일하고 있었으며, 자녀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해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루이나어는 거의 하지 못했다.
4.4. 옹립 시도 [편집]
1882년 12월 3일, 뮈롱이 벨포르에 도착했다. 왕비는 그를 왕궁이 아니라 남부 고지의 카엘몬트 성에 머물게 했다. 벨포르 궁정에 두면 의회의 감시를 피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고, 동시에 옛 카엘몬트 왕조의 본거지에 그를 앉힘으로써 혈통의 정통성을 시각적으로 보이려는 계산이기도 했다.
12월 11일 왕비는 추밀원 잔여 위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뮈롱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제이머스 3세」로 즉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서한에 첨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12월 11일 왕비는 추밀원 잔여 위원들에게 서한을 보내 뮈롱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제이머스 3세」로 즉위시킬 것을 요구했다. 서한에 첨부된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 따라서 그 직계 후손의 청구권은 형식상 소멸하지 않았다
- 뮈롱은 개종 서약과 루이나어 학습을 조건으로 수락한다
- 국왕이 즉위할 때까지 왕비가 섭정을 맡는다
마지막 항목이 결정적이었다. 의회 안에서 이 서한은 계승 주장이 아니라 섭정 요구로 읽혔고, 왕비가 실권을 노린다는 의심은 이때 굳어졌다.
12월 하순 왕비는 남부 고지의 유력 귀족들과 육군 남부·서부 관구 지휘관들을 접촉했다. 오를레인 백작이 이 시기에 왕비 측에 가담했으며, 왕실 재무관 라이너 폰 슈트라흐는 왕실 사유 재산을 담보로 대륙 은행에서 차입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뒷날 검찰은 이 차입 준비를 왕비가 12월 시점에 이미 무력 충돌을 상정하고 있었다는 증거로 제시했다.
4.5. 의회의 거부와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 [편집]
1883년 1월 8일 의회가 재개되자 왕비의 서한이 곧바로 안건에 올랐다. 논의는 3주간 이어졌고, 반대 논거는 세 갈래로 정리되었다.
첫째, 헌정 논거. 1689년 왕위협약이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 협약 이후 제정된 개신교 계승법이 계승 순위를 새로 확정했으므로 구 계열의 청구권은 이미 대체되었다는 주장이다. 뮈롱을 세우는 것은 협약 이후 193년간 쌓인 헌정 질서 전체를 무효화하는 일이라는 논리였다.
둘째, 추대 논거. 국왕을 세우는 권한은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 이래 왕비 개인이 아니라 대표기구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거는 공화파 의원들이 아니라 왕당파에 가까운 온건 보수 의원들이 주도해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왕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취지였으나, 2년 뒤 이 논거는 왕정을 폐지하는 근거로 그대로 쓰이게 된다.
셋째, 주권 논거. 루이나어를 하지 못하고 루이나에 거주한 적도 없는 인물을 대륙 출신 왕비가 데려와 앉히고 스스로 섭정을 맡겠다는 것은 사실상 외국의 섭정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거가 여론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1883년 2월 2일, 의회는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를 재석 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결의의 골자는 네 항목이었다.
첫째, 헌정 논거. 1689년 왕위협약이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그 협약 이후 제정된 개신교 계승법이 계승 순위를 새로 확정했으므로 구 계열의 청구권은 이미 대체되었다는 주장이다. 뮈롱을 세우는 것은 협약 이후 193년간 쌓인 헌정 질서 전체를 무효화하는 일이라는 논리였다.
둘째, 추대 논거. 국왕을 세우는 권한은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 이래 왕비 개인이 아니라 대표기구에 있다는 주장이다. 이 논거는 공화파 의원들이 아니라 왕당파에 가까운 온건 보수 의원들이 주도해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왕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취지였으나, 2년 뒤 이 논거는 왕정을 폐지하는 근거로 그대로 쓰이게 된다.
셋째, 주권 논거. 루이나어를 하지 못하고 루이나에 거주한 적도 없는 인물을 대륙 출신 왕비가 데려와 앉히고 스스로 섭정을 맡겠다는 것은 사실상 외국의 섭정이라는 주장이다. 이 논거가 여론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1883년 2월 2일, 의회는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를 재석 의원 과반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결의의 골자는 네 항목이었다.
- 제1항 — 가스파르 뮈롱 및 그 계열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 제2항 — 왕위 계승자의 확정은 오로지 의회의 입법으로만 이루어진다
- 제3항 — 왕태후 아델하이트는 계승 순위에 있지 아니하며, 섭정직을 주장할 근거를 갖지 아니한다
- 제4항 — 계승자가 확정될 때까지 국정은 내각이 대행하며, 어떠한 개인도 국왕의 대권을 행사할 수 없다
제4항이 이후 모든 분쟁의 초점이 되었다. 왕비 측은 이 조항이 국왕 대권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고 보아 헌정 파괴로 규정했고, 의회는 왕이 없는 동안 대권이 정지된다는 당연한 확인일 뿐이라고 맞섰다.
4.6. 의회 해산 칙령과 사법부의 분열 [편집]
1883년 2월 9일, 아델하이트는 카엘몬트 성에서 의회 해산 칙령을 발했다. 칙령의 형식은 통상적인 국왕 칙령이었으나 서명란에는 국왕의 이름이 없었고, 대신 "왕태후 겸 섭정"이라는 자칭 직함으로 서명되어 있었다. 부서(副署)한 각료도 없었다.
칙령의 효력을 둘러싼 문제는 즉각적이었다. 루이나 헌정 관행상 의회 해산은 국왕의 대권이며, 국왕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를 대행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정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비 측은 국왕 부재 시 대권이 왕실에 유보된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대권이 정지된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도 명문 근거를 대지 못했다.
사법부는 이 문제에서 둘로 갈라졌다.
2월 12일, 벨포르 왕좌부 판사 아르망 델롱은 칙령을 무효로 판시하면서 아델하이트에 대해 대권 참칭 및 내란 예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델롱은 공화파 성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고, 판결문에서 국왕이 없는 나라에 국왕의 권한이 있을 수 없다고 적었다.
같은 날 오후, 남부 고지 순회재판소 수석판사 토머스 오스굿은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2월 2일 결의가 국왕 대권을 침해한 위법한 의결이라고 판시하고, 결의안을 발의한 의원 아홉 명과 의회 의장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에 대해 반역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오스굿은 남부 고지 출신으로 왕당파와의 연고가 깊었다.
이틀 사이에 같은 나라의 두 법원이 서로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한 셈이었다. 델롱의 영장은 남부 고지에서 집행되지 않았고, 오스굿의 영장은 벨포르에서 집행되지 않았다. 2월 중순부터 각 지방 법원과 치안 판사들이 어느 쪽 영장을 인정할지를 두고 개별적으로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실상 각 지역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선언하는 절차가 되었다.
혼란은 법정 바깥으로 번졌다. 내해 연안 도시들에서는 오스굿의 영장을 집행하려던 왕당파 치안관들이 시민들에게 저지당했고, 남부 고지에서는 델롱의 영장을 들고 온 벨포르 집행관들이 억류되었다. 2월 하순에는 두 개의 영장을 동시에 받아 든 지방 판사가 양쪽 모두의 집행을 보류한 채 사임하는 일이 잇따랐다. 대법원은 이 사태에 대해 끝내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2월 26일, 의회는 오스굿을 탄핵하고 남부 고지 순회재판소의 관할을 정지시켰다. 다음 날 아델하이트는 델롱의 판사직을 박탈하는 칙령을 발했다. 어느 조치도 상대 지역에서는 효력을 갖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루이나에는 왕이 없었고, 정당한 의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었으며, 서로를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두 개의 사법 체계가 있었다. 남은 것은 무력뿐이었다. 사흘 뒤인 3월 2일, 왕당파는 카엘몬트 성에서 가스파르 뮈롱을 국왕 「제이머스 3세」로 선포했다.
칙령의 효력을 둘러싼 문제는 즉각적이었다. 루이나 헌정 관행상 의회 해산은 국왕의 대권이며, 국왕이 부재한 상태에서 이를 대행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정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왕비 측은 국왕 부재 시 대권이 왕실에 유보된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대권이 정지된다고 주장했다. 어느 쪽도 명문 근거를 대지 못했다.
사법부는 이 문제에서 둘로 갈라졌다.
2월 12일, 벨포르 왕좌부 판사 아르망 델롱은 칙령을 무효로 판시하면서 아델하이트에 대해 대권 참칭 및 내란 예비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델롱은 공화파 성향으로 알려진 인물이었고, 판결문에서 국왕이 없는 나라에 국왕의 권한이 있을 수 없다고 적었다.
같은 날 오후, 남부 고지 순회재판소 수석판사 토머스 오스굿은 정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그는 2월 2일 결의가 국왕 대권을 침해한 위법한 의결이라고 판시하고, 결의안을 발의한 의원 아홉 명과 의회 의장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에 대해 반역 혐의로 체포 영장을 발부했다. 오스굿은 남부 고지 출신으로 왕당파와의 연고가 깊었다.
이틀 사이에 같은 나라의 두 법원이 서로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한 셈이었다. 델롱의 영장은 남부 고지에서 집행되지 않았고, 오스굿의 영장은 벨포르에서 집행되지 않았다. 2월 중순부터 각 지방 법원과 치안 판사들이 어느 쪽 영장을 인정할지를 두고 개별적으로 입장을 밝히기 시작했으며, 이는 사실상 각 지역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선언하는 절차가 되었다.
혼란은 법정 바깥으로 번졌다. 내해 연안 도시들에서는 오스굿의 영장을 집행하려던 왕당파 치안관들이 시민들에게 저지당했고, 남부 고지에서는 델롱의 영장을 들고 온 벨포르 집행관들이 억류되었다. 2월 하순에는 두 개의 영장을 동시에 받아 든 지방 판사가 양쪽 모두의 집행을 보류한 채 사임하는 일이 잇따랐다. 대법원은 이 사태에 대해 끝내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2월 26일, 의회는 오스굿을 탄핵하고 남부 고지 순회재판소의 관할을 정지시켰다. 다음 날 아델하이트는 델롱의 판사직을 박탈하는 칙령을 발했다. 어느 조치도 상대 지역에서는 효력을 갖지 못했다.
이 시점에서 루이나에는 왕이 없었고, 정당한 의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었으며, 서로를 체포하라고 명령하는 두 개의 사법 체계가 있었다. 남은 것은 무력뿐이었다. 사흘 뒤인 3월 2일, 왕당파는 카엘몬트 성에서 가스파르 뮈롱을 국왕 「제이머스 3세」로 선포했다.
5. 양 진영 [편집]
두 진영의 이름은 어느 쪽도 스스로 붙인 것이 아니다. 은사슴단은 왕당파가 알드리크 왕조의 옛 문장에서 딴 은사슴 휘장을 달고 다닌 데서 상대편이 붙인 호칭이며, 벨포르 연합은 왕당파가 의회파를 두고 "벨포르에 모여 앉은 무리"라고 부른 것이 굳어진 것이다. 두 이름 모두 조롱에서 출발했으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당사자들도 그대로 쓰게 되었다.
전선은 이념보다 지리와 산업 구조를 따라 갈렸다. 대체로 바다와 공장이 있는 곳은 의회 편에, 땅과 오래된 위계가 있는 곳은 왕당파 편에 섰다. 이 구도는 개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3년 내내 거의 바뀌지 않았다.
전선은 이념보다 지리와 산업 구조를 따라 갈렸다. 대체로 바다와 공장이 있는 곳은 의회 편에, 땅과 오래된 위계가 있는 곳은 왕당파 편에 섰다. 이 구도는 개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고, 3년 내내 거의 바뀌지 않았다.
5.1. 벨포르 연합 [편집]
5.1.1. 구성과 기반 [편집]
정식 명칭은 의회연합(The Parliamentary Union)이었다. 1883년 2월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에 찬성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며, 개전 시점에 하원 재적 의원 452명 가운데 271명이 이름을 올렸다.
지리적 기반은 내해 연안과 북부였다. 벨포르를 비롯해 할렌, 엘름스터, 로엔포드, 케이드윈 등 내해에 면한 상공업 도시 전부가 의회 편에 섰다. 이들 도시는 1832년 선거법 이후 의석이 크게 늘어난 곳이었고, 그만큼 의회를 자신들의 기구로 여기는 정도가 강했다. 서부 항구 도시들도 대체로 같은 입장이었다.
사회적 기반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
지리적 기반은 내해 연안과 북부였다. 벨포르를 비롯해 할렌, 엘름스터, 로엔포드, 케이드윈 등 내해에 면한 상공업 도시 전부가 의회 편에 섰다. 이들 도시는 1832년 선거법 이후 의석이 크게 늘어난 곳이었고, 그만큼 의회를 자신들의 기구로 여기는 정도가 강했다. 서부 항구 도시들도 대체로 같은 입장이었다.
사회적 기반은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
- 산업 자본 — 조선업, 철강, 기계 제조, 철도 회사. 이들에게 왕비의 옹립 시도는 대륙 자본이 루이나 왕실을 매개로 들어오는 통로로 보였다. 특히 라이너 폰 슈트라흐가 대륙 은행에서 왕실 사유 재산을 담보로 차입을 준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발이 커졌다.
- 도시 노동자와 숙련공 — 조선소와 제철소의 노동조합 다수가 개전 직후 의회 지지를 결의했다. 다만 이들의 동기는 헌정 원칙보다 고용 안정에 있었다. 전쟁이 길어지면 항만과 공장이 닫힌다는 우려가 컸다.
군사적 기반은 압도적으로 해군이었다. 개전 당시 루이나 왕립함대의 주력함 36척 가운데 34척이 의회 측 항구에 정박해 있었고, 해군 장교단은 거의 전원이 의회 편에 섰다. 육군은 정반대여서, 개전 시점에 의회가 확보한 정규 육군은 북부 관구와 수도 방위대뿐이었다. 부족한 병력은 도시 민병대와 지원병으로 메웠고, 1883년 여름까지 약 6만 명이 새로 편성되었다.
5.1.2. 지휘 체계 [편집]
의회파의 지휘 구조는 문민 우위를 처음부터 명문화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최고 의사 결정 기구는 1883년 3월 6일 설치된 국방위원회였다. 의회 의장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위원장을 맡았고, 위원 11명 가운데 군인은 3명뿐이었다. 위원회는 개전 직후 세 가지를 결정했다.
최고 의사 결정 기구는 1883년 3월 6일 설치된 국방위원회였다. 의회 의장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위원장을 맡았고, 위원 11명 가운데 군인은 3명뿐이었다. 위원회는 개전 직후 세 가지를 결정했다.
- 군의 모든 작전은 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는다
- 어떠한 지휘관도 정치적 성명을 발표할 수 없다
- 전쟁이 끝나면 신설 부대는 6개월 이내에 해산한다
세 번째 조항은 이후 자주 인용되었다. 왕당파를 이기고 나서 그 군대가 무엇이 될 것인가를 개전 첫 달에 이미 제한해 둔 셈이었기 때문이다.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 — 의회 의장이자 국방위원회 위원장. 내해 연안 항구 도시 출신의 법률가로, 전쟁 내내 군복을 입지 않았고 전선을 방문한 것도 두 차례에 그쳤다. 그가 의도적으로 유지한 이 거리는 전후 그를 독재자로 만들 수 있는 여지를 스스로 차단한 것으로 평가된다.
- 에드거 몰리뉴 — 해군 대장. 개전 직후 해상 봉쇄를 입안하고 집행했다. 이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었으나, 봉쇄로 인한 민간인 아사에 대한 책임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 리처드 A. 손힐 — 의회군 총사령관. 북부 관구 사령관 출신으로, 개전 시점에 의회 편에 선 최고위 육군 장교였다. 정규군 경험이 부족한 민병대를 하나의 군으로 묶는 일을 맡았다.
- 제임스 카버 — 1884년 남부 고지 진격군 사령관. 전쟁 후반의 공세를 지휘했다.
5.1.3. 명분 [편집]
의회파의 주장은 왕정을 지키기 위해 왕비를 막는다는 것이었다. 이 점은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개전 시점에 의회파 다수는 공화주의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왕정의 존속을 전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핵심 논리는 세 단계였다.
핵심 논리는 세 단계였다.
- 왕을 세우는 권한은 1372년 벨포르 추대회의 이래 대표기구에 있다
- 왕비는 그 권한을 갖지 않으며, 그것을 자칭하는 것은 왕정 자체를 사유화하는 행위다
- 따라서 왕비를 막는 것은 왕정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 왕정의 원칙을 지키는 일이다
이 논리를 가장 강하게 주장한 것은 공화파가 아니라 온건 보수 의원들이었다. 이들에게 왕정은 절차의 산물이었고, 절차를 무시하고 세워진 왕은 왕이 아니었다. 개전 당시 벨포르 연합의 공식 성명이 "우리는 왕관에 맞서지 않는다. 왕관을 훔치려는 손에 맞선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명분이 2년 뒤 어떻게 뒤집히는지가 이 전쟁의 역설이다. 왕을 세울 권한이 의회에 있다는 논거는, 1885년에 그 권한으로 왕위를 세우지 않기로 결정하는 근거가 되었다.
5.2. 은사슴단 [편집]
5.2.1. 구성과 기반 [편집]
정식 명칭은 왕위수호동맹(League for the Defence of the Succession)이었다. 1883년 1월 카엘몬트 성에서 결성되었으며, 창립 문서에 서명한 인물은 귀족 47명, 성직자 22명, 육군 장교 31명이었다.
지리적 기반은 남부 고지와 서부·남부 내륙이었다. 남부 고지는 1709년 합병법으로 왕국에 병합되었으나 그 뒤로도 별개의 법 관행과 교회 조직,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벨포르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었다. 왕비가 뮈롱을 이곳에 앉힌 것은 그 반감을 정확히 계산한 선택이었다.
사회적 기반은 네 층이었다.
지리적 기반은 남부 고지와 서부·남부 내륙이었다. 남부 고지는 1709년 합병법으로 왕국에 병합되었으나 그 뒤로도 별개의 법 관행과 교회 조직, 지역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벨포르에 대한 반감이 뿌리 깊었다. 왕비가 뮈롱을 이곳에 앉힌 것은 그 반감을 정확히 계산한 선택이었다.
사회적 기반은 네 층이었다.
- 옛 카엘몬트계 귀족 — 카엘몬트 왕조 시기에 형성된 남부 고지의 대지주 가문들. 이들은 1709년 이후 정치적 영향력이 꾸준히 줄어들었고, 이번 사태를 지위를 회복할 기회로 보았다.
- 내륙 대지주 — 서부와 남부 내륙의 농업 지주층. 1832년 선거법과 이후의 선거구 개편으로 의석 비중이 계속 줄어든 계층이며, 의회를 도시의 기구로 여겼다.
- 육군 남부·서부 관구 — 개전 시점에 왕당파에 가담한 정규 육군은 약 5만 2천 명으로, 의회 측 정규 육군의 두 배가 넘었다.
약점은 바다였다. 남부 고지에는 대형 조선소가 없었고, 왕당파가 확보한 함선은 연안 경비정 수준의 2척뿐이었다. 무기와 탄약의 상당 부분을 대륙에서 들여와야 했으나 그 통로가 곧 막혔다.
5.2.2. 지휘 체계 [편집]
왕당파의 지휘 구조는 중심이 셋이었고, 그 셋이 서로 조율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진영의 근본 문제였다.
- 명목상의 정점 — 국왕 「제이머스 3세」. 그의 이름으로 모든 문서가 발행되었으나 그는 군을 지휘하거나 정책을 결정한 바 없다. 서명한 문서 대부분이 대필이었고, 회의에 배석하되 발언하지 않았다.
- 실질적 결정권자 — 아델하이트. 공식 직함은 없었다. 「왕태후 겸 섭정」을 자칭했으나 의회는 물론 왕당파 내부에서도 이 직함의 법적 근거를 두고 이견이 있었다. 자금 조달과 대외 교섭, 인사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 군사 지휘 — 오를레인 백작. 남부 고지 사령관으로서 야전을 총괄했다.
세 축의 관계는 처음부터 불안정했다. 오를레인 백작은 여러 차례 왕비의 군사 개입에 반발했고, 1884년 봄에는 보급 우선순위를 두고 정면 충돌했다. 왕실 재무관 라이너 폰 슈트라흐가 왕비 편에 서면서 백작은 자금 배분에서 밀렸고, 이후 남부 고지 방위선의 재편은 지연되었다.
가장 심각한 구조적 결함은 군을 통합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규 육군 관구, 귀족들의 사병, 지역 민병대가 각각 다른 계통으로 편성되어 있었고, 이를 하나로 묶는 총사령부는 1884년 3월에야 설치되었다. 그 무렵에는 이미 보급이 무너진 뒤였다.
5.2.3. 명분 [편집]
왕당파의 주장은 혈통은 표결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핵심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 왕위는 신이 정한 혈통을 따라 이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고르는 것이 아니다
- 의회가 왕을 고르기 시작하는 순간 왕정은 이미 끝난 것이다
세 번째 명제가 이 진영의 핵심이었고, 동시에 가장 뼈아픈 대목이었다. 그들이 옳았기 때문이다. 2년 뒤 의회는 정확히 그 권한을 행사해 왕위를 없앴다.
한편 왕당파 내부에는 처음부터 균열이 있었다. 상당수 지지자에게 중요한 것은 뮈롱 개인이 아니라 벨포르의 지배에 대한 반대였다. 남부 고지의 농민과 소지주들에게 이 전쟁은 계승 문제가 아니라 지역의 자치를 둘러싼 싸움이었고, 실제로 왕당파 소책자들은 남부 고지에서 배포될 때 계승 논쟁보다 벨포르의 세금과 간섭을 강조하는 판본으로 바뀌었다.
뮈롱 자신이 이 명분의 가장 약한 고리였다는 점도 지적된다. 혈통이 왕을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내세운 인물이 루이나어를 못하는 대륙의 목수였기 때문이다. 왕당파 지식인들은 이 사실을 오히려 논거로 삼았다. 자질 때문이 아니라 오직 혈통 때문에 왕인 사람이야말로 왕권이 사람의 선택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것이었다. 이 논리는 내부 결속에는 효과가 있었으나 중립 지대를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5.3. 중립과 관망 [편집]
전국이 두 편으로 갈린 것은 아니었다. 개전 시점에 어느 쪽에도 서지 않은 세력이 상당했고, 이들의 향배가 1883년 한 해 동안 전황만큼 중요한 변수였다.
관망한 지역 — 동부 농업 지대와 북서부 목축 지역은 1883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이들 지역의 지주들은 왕당파와 이해관계가 겹쳤으나 남부 고지와의 연고가 없었고, 무엇보다 전쟁이 짧게 끝나리라 보았다. 1884년 봄 왕당파의 패색이 짙어지자 대부분 의회 측에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관망한 계층 — 벨포르의 금융권 일부는 개전 후 반년가량 태도를 유보했다. 왕실 채권과 왕실 사유 재산에 대한 대출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1883년 9월 의회가 「전시 채무 처리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왕실 채무의 승계를 보장하자 이들 대부분이 의회 측으로 정리되었다.
분열된 조직 — 루이나 교회는 끝내 공식 입장을 내지 못했다. 대주교는 양측 모두에게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만 두 차례 발표했고, 개별 교구는 지역에 따라 갈렸다. 사법부의 분열은 이미 개전 전에 드러나 있었으며, 대법원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중립을 선언한 도시 — 남부 고지 접경의 몇몇 도시는 양측 군대의 통행을 모두 거부하는 중립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1883년 8월 이후 이들 도시는 차례로 점령되었고, 대부분 왕당파의 보급 거점으로 편입되었다가 이듬해 의회군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두 차례의 점령을 겪은 이 지역들이 전쟁 피해가 가장 컸다.
관망한 지역 — 동부 농업 지대와 북서부 목축 지역은 1883년 내내 중립을 유지했다. 이들 지역의 지주들은 왕당파와 이해관계가 겹쳤으나 남부 고지와의 연고가 없었고, 무엇보다 전쟁이 짧게 끝나리라 보았다. 1884년 봄 왕당파의 패색이 짙어지자 대부분 의회 측에 협조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관망한 계층 — 벨포르의 금융권 일부는 개전 후 반년가량 태도를 유보했다. 왕실 채권과 왕실 사유 재산에 대한 대출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1883년 9월 의회가 「전시 채무 처리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왕실 채무의 승계를 보장하자 이들 대부분이 의회 측으로 정리되었다.
분열된 조직 — 루이나 교회는 끝내 공식 입장을 내지 못했다. 대주교는 양측 모두에게 자제를 요청하는 성명만 두 차례 발표했고, 개별 교구는 지역에 따라 갈렸다. 사법부의 분열은 이미 개전 전에 드러나 있었으며, 대법원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았다.
중립을 선언한 도시 — 남부 고지 접경의 몇몇 도시는 양측 군대의 통행을 모두 거부하는 중립 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1883년 8월 이후 이들 도시는 차례로 점령되었고, 대부분 왕당파의 보급 거점으로 편입되었다가 이듬해 의회군에게 다시 점령당했다. 두 차례의 점령을 겪은 이 지역들이 전쟁 피해가 가장 컸다.
6. 전개 [편집]
7. 주요 전투 [편집]
8. 국제 정세 [편집]
계승전쟁은 국제전으로 번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외부 세력이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입할 만한 이익이 어느 쪽에도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80년대 초 유럽의 관심은 발칸과 아프리카 분할에 쏠려 있었고, 벵골을 잃은 뒤의 루이나는 더 이상 판을 흔들 수 있는 나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무관심이 결과적으로 의회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왕당파는 육상 국경이 없는 나라에서 해상 지원 없이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해상은 처음부터 상대편의 것이었다.
이 무관심이 결과적으로 의회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왕당파는 육상 국경이 없는 나라에서 해상 지원 없이는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고, 해상은 처음부터 상대편의 것이었다.
8.1. 하르슈타트 공국의 개입 시도 [편집]
아델하이트의 친정인 하르슈타트 공국은 이 전쟁에서 왕당파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유일한 국가였다. 1883년 4월 18일 하르슈타트 공 프리드리히는 「제이머스 3세」를 루이나의 정당한 국왕으로 인정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5월에 벨덴이 아닌 카엘몬트 성으로 공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 승인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크지 않았다. 하르슈타트는 인구 40만이 채 되지 않는 대륙의 소공국이었고, 상비군은 6천 명,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국이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에 그쳤다.
그러나 이 승인이 실질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크지 않았다. 하르슈타트는 인구 40만이 채 되지 않는 대륙의 소공국이었고, 상비군은 6천 명, 해군은 존재하지 않았다. 공국이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에 그쳤다.
- 자금 — 1883년 여름 공가 명의로 대륙 은행 두 곳에서 차관을 주선했다. 그러나 담보였던 왕실 사유 재산의 소유권 자체가 분쟁 중이었으므로 조건은 매우 불리했고, 실제 인출액은 요청액의 3분의 1에 못 미쳤다.
- 무기 — 소총 약 1만 4천 정과 야포 22문을 매입해 선적했다. 이 가운데 남부 고지에 도달한 것은 1883년 7월의 1차분뿐이었고, 8월 이후의 선적분은 전량 나포되거나 중립항에 억류되었다.
하르슈타트의 개입은 왕당파에게 도움이 되기보다 부담이 되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의회파의 주권 논거 — 대륙 출신 왕비가 외국의 힘을 빌려 루이나에 왕을 세우려 한다는 주장 — 을 사실로 입증해 주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1883년 여름 벨포르에서 발행된 소책자들은 하르슈타트 공사의 카엘몬트 부임을 두고 "왕비가 마침내 자기 나라의 깃발을 들여왔다"고 썼다.
전쟁이 끝난 뒤 하르슈타트는 승인을 철회하고 루이나 제1공화국과 관계를 정상화하려 했으나, 공화국은 1889년까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델하이트가 종신 국외 추방 처분을 받은 뒤 하르슈타트가 아니라 플로렌시아에 정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친정 나라에 머무는 것이 양국 모두에게 부담이었다.
8.2. 플로렌시아와 이베리아의 태도 [편집]
두 나라는 왕당파에 대한 사실상의 호의를 보였으나 공식 승인은 끝내 하지 않았다.
플로렌시아의 입장은 계산적이었다. 루이나는 1558년 카르네 항 상실 이래 300년 넘게 경쟁 관계였고, 1871년 벵골에서 루이나를 밀어낸 것도 플로렌시아였다. 루이나가 내전으로 약화되는 것은 명백한 이익이었으나, 개입해서 얻을 것은 많지 않았다. 왕당파가 이긴다 해도 왕비의 배후에는 하르슈타트가 있었지 플로렌시아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로렌시아가 택한 것은 전쟁을 길게 끄는 쪽이었다. 자국 항구에서 남부 고지행 화물의 선적을 눈감아 주었고, 왕당파 요원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1883년 가을 이후에는 나포된 선박에 대한 항의를 형식적으로만 제기했다. 그러나 정규군을 보내거나 승인을 부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1884년 1월 왕당파 특사가 필라델피아에서 군사 지원을 요청했을 때 외무성이 내놓은 답은 "루이나의 국내 문제에 관여할 뜻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베리아의 태도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뮈롱가는 대륙 정착 과정에서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베리아 언론과 성직자들은 이를 근거로 왕당파를 1531년 이래 끊겼던 루이나 가톨릭 왕통의 회복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베리아 정부의 실제 조치는 미미했다. 자금 일부와 소총 3천 정가량이 민간 경로로 전달된 것이 확인될 뿐이며,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었다.
두 나라 모두 승인을 유보한 결정적 이유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없는 진영이 해양 국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은 1883년 여름에 이미 각국 무관들의 보고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승인은 이긴 쪽에 하는 것이 외교의 상식이었고, 왕당파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플로렌시아의 입장은 계산적이었다. 루이나는 1558년 카르네 항 상실 이래 300년 넘게 경쟁 관계였고, 1871년 벵골에서 루이나를 밀어낸 것도 플로렌시아였다. 루이나가 내전으로 약화되는 것은 명백한 이익이었으나, 개입해서 얻을 것은 많지 않았다. 왕당파가 이긴다 해도 왕비의 배후에는 하르슈타트가 있었지 플로렌시아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로렌시아가 택한 것은 전쟁을 길게 끄는 쪽이었다. 자국 항구에서 남부 고지행 화물의 선적을 눈감아 주었고, 왕당파 요원의 통행을 제한하지 않았으며, 1883년 가을 이후에는 나포된 선박에 대한 항의를 형식적으로만 제기했다. 그러나 정규군을 보내거나 승인을 부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1884년 1월 왕당파 특사가 필라델피아에서 군사 지원을 요청했을 때 외무성이 내놓은 답은 "루이나의 국내 문제에 관여할 뜻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베리아의 태도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뮈롱가는 대륙 정착 과정에서 가톨릭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베리아 언론과 성직자들은 이를 근거로 왕당파를 1531년 이래 끊겼던 루이나 가톨릭 왕통의 회복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베리아 정부의 실제 조치는 미미했다. 자금 일부와 소총 3천 정가량이 민간 경로로 전달된 것이 확인될 뿐이며, 정부 차원의 지원은 없었다.
두 나라 모두 승인을 유보한 결정적 이유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해군이 없는 진영이 해양 국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계산은 1883년 여름에 이미 각국 무관들의 보고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승인은 이긴 쪽에 하는 것이 외교의 상식이었고, 왕당파는 끝내 이기지 못했다.
8.3. 미합중제국·빌베른과 해상 봉쇄 [편집]
미합중제국과 빌베른은 어느 쪽도 공식 승인하지 않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의회파에 유리하게 움직였다. 이유는 이념이 아니라 교역이었다.
의회파가 내해 연안의 공업 지대와 주요 항구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나라의 대(對)루이나 무역은 사실상 전부 의회파 통제 지역과의 거래였다. 빌베른의 해운업계와 미합중제국의 곡물·기계 수출업자에게 의회파는 이미 거래 상대였고, 왕당파는 거래할 것이 없는 내륙 세력이었다.
문제는 해상 봉쇄의 국제법적 지위였다. 1883년 4월 에드거 몰리뉴가 남부 고지 연안에 대한 봉쇄를 선포했을 때, 이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에서의 봉쇄였다. 국제 관행상 내전에서 정부 측이 반란 지역을 봉쇄하려면 상대를 교전 단체로 승인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왕당파에게 국제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결과가 되었다.
의회파는 이 딜레마를 봉쇄가 아니라 항만 폐쇄라고 규정하는 방식으로 우회했다. 남부 고지의 항구들은 외국에 개방된 적이 없는 국내 항구이며, 국내 항구를 닫는 것은 주권 행위이지 봉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법적으로 취약했으나 두 나라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빌베른은 1883년 6월 자국 선박에 대해 남부 고지 항구 출입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발표했고, 미합중제국은 같은 해 8월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두 나라 모두 이를 중립 조치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효과는 왕당파의 마지막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다. 하르슈타트가 매입한 무기의 8월 이후 선적분이 중립항에 억류된 것도 이 조치 때문이었다.
전후에 이 결정들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왕당파 잔존 세력과 일부 대륙 법학자들은 두 나라가 중립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한쪽 편을 들었으며, 1883년 겨울 남부 고지의 대량 아사에 간접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나라 정부는 자국 선박의 안전을 위한 권고였을 뿐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유지했다.
의회파가 내해 연안의 공업 지대와 주요 항구 전부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나라의 대(對)루이나 무역은 사실상 전부 의회파 통제 지역과의 거래였다. 빌베른의 해운업계와 미합중제국의 곡물·기계 수출업자에게 의회파는 이미 거래 상대였고, 왕당파는 거래할 것이 없는 내륙 세력이었다.
문제는 해상 봉쇄의 국제법적 지위였다. 1883년 4월 에드거 몰리뉴가 남부 고지 연안에 대한 봉쇄를 선포했을 때, 이는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이 아니라 내전에서의 봉쇄였다. 국제 관행상 내전에서 정부 측이 반란 지역을 봉쇄하려면 상대를 교전 단체로 승인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왕당파에게 국제법적 지위를 부여하는 결과가 되었다.
의회파는 이 딜레마를 봉쇄가 아니라 항만 폐쇄라고 규정하는 방식으로 우회했다. 남부 고지의 항구들은 외국에 개방된 적이 없는 국내 항구이며, 국내 항구를 닫는 것은 주권 행위이지 봉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법적으로 취약했으나 두 나라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빌베른은 1883년 6월 자국 선박에 대해 남부 고지 항구 출입을 자제하라는 권고를 발표했고, 미합중제국은 같은 해 8월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두 나라 모두 이를 중립 조치라고 설명했으나, 실제 효과는 왕당파의 마지막 보급선을 끊는 것이었다. 하르슈타트가 매입한 무기의 8월 이후 선적분이 중립항에 억류된 것도 이 조치 때문이었다.
전후에 이 결정들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왕당파 잔존 세력과 일부 대륙 법학자들은 두 나라가 중립을 표방하면서 실제로는 한쪽 편을 들었으며, 1883년 겨울 남부 고지의 대량 아사에 간접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두 나라 정부는 자국 선박의 안전을 위한 권고였을 뿐이라는 입장을 끝까지 유지했다.
8.4. 승인 문제 [편집]
이 전쟁에서 가장 특이한 대목은 의회파가 어떤 나라의 승인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전의 당사자는 대개 외부의 승인을 얻어 정통성을 보강하려 한다. 왕당파가 하르슈타트의 승인을 받고 플로렌시아와 이베리아를 상대로 승인 외교를 편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벨포르 연합은 정반대의 방침을 택했다. 1883년 3월 국방위원회가 결정한 외교 방침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승인을 구하는 것은 승인이 필요한 상태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의회파의 논리는 이러했다. 자신들은 반란 세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구성된 의회이며, 국왕 부재 시 국정을 대행하는 내각은 이미 정통 정부다. 따라서 승인을 요청할 이유가 없고, 요청하는 순간 스스로를 두 개의 정통성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 된다. 반대로 어떤 나라가 왕당파를 승인한다면 그것은 루이나의 국내 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다.
이 방침은 실무적으로 불편했다. 전쟁 기간 내내 의회파는 외국 정부와 공식 협상을 하지 않았고, 필요한 조율은 전부 기존 대사관 경로와 민간 상업 채널로 처리했다. 무기 구매도 정부 간 계약이 아니라 민간 회사를 통한 상거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 방침이 결정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루이나 제1공화국은 승계 정부가 아니라 연속된 정부로서 출범할 수 있었다. 새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나라가 왕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이므로, 조약과 채무, 외교 관계가 그대로 이어졌다. 실제로 공화국은 1885년 이후 어떤 나라와도 새로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다. 수립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르슈타트만이 예외였다. 왕당파를 승인함으로써 스스로 관계를 단절한 셈이 되었고, 정상화까지 4년이 걸렸다.
내전의 당사자는 대개 외부의 승인을 얻어 정통성을 보강하려 한다. 왕당파가 하르슈타트의 승인을 받고 플로렌시아와 이베리아를 상대로 승인 외교를 편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벨포르 연합은 정반대의 방침을 택했다. 1883년 3월 국방위원회가 결정한 외교 방침은 다음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승인을 구하는 것은 승인이 필요한 상태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의회파의 논리는 이러했다. 자신들은 반란 세력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구성된 의회이며, 국왕 부재 시 국정을 대행하는 내각은 이미 정통 정부다. 따라서 승인을 요청할 이유가 없고, 요청하는 순간 스스로를 두 개의 정통성 가운데 하나로 격하시키는 것이 된다. 반대로 어떤 나라가 왕당파를 승인한다면 그것은 루이나의 국내 문제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다.
이 방침은 실무적으로 불편했다. 전쟁 기간 내내 의회파는 외국 정부와 공식 협상을 하지 않았고, 필요한 조율은 전부 기존 대사관 경로와 민간 상업 채널로 처리했다. 무기 구매도 정부 간 계약이 아니라 민간 회사를 통한 상거래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이 방침이 결정적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루이나 제1공화국은 승계 정부가 아니라 연속된 정부로서 출범할 수 있었다. 새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나라가 왕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이므로, 조약과 채무, 외교 관계가 그대로 이어졌다. 실제로 공화국은 1885년 이후 어떤 나라와도 새로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다. 수립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르슈타트만이 예외였다. 왕당파를 승인함으로써 스스로 관계를 단절한 셈이 되었고, 정상화까지 4년이 걸렸다.
9. 전쟁 범죄와 민간인 피해 [편집]
이 전쟁의 민간인 피해는 오랫동안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기록을 남기고 정리한 쪽이 승자였기 때문이다.
전후 조사는 1885년 의회가 설치한 전시 피해 조사단이 담당했다. 조사단은 왕당파 점령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항목별로 수집해 이듬해 보고서를 냈으나, 의회군과 해군의 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을 두지 않았다. 봉쇄로 인한 사망은 전쟁의 부수적 결과로 분류되었고, 그 항목의 서술은 두 쪽에 그쳤다.
반대편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남부 고지의 교구 대장과 지방 행정 문서는 1884년 여름 진격 과정에서 상당수가 불탔고, 남은 것도 전후 왕당파 관련 문건이 몰수·폐기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이 시기 남부 고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교회 매장 기록, 의사와 성직자의 개인 일지, 그리고 전후 대륙으로 망명한 인사들이 남긴 회고록 정도다.
그 결과 양측의 숫자는 크게 어긋난다. 조사단 보고서가 제시한 민간인 사망자는 1만 명 안팎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교구 매장 기록을 대조한 연구들은 그보다 훨씬 큰 수치를 제시한다. 오늘날 통용되는 1만 7천 명이라는 추정도 확정된 것이 아니며, 연구자에 따라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어느 쪽 기록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분야의 일반적인 전제다.
전후 조사는 1885년 의회가 설치한 전시 피해 조사단이 담당했다. 조사단은 왕당파 점령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을 항목별로 수집해 이듬해 보고서를 냈으나, 의회군과 해군의 행위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을 두지 않았다. 봉쇄로 인한 사망은 전쟁의 부수적 결과로 분류되었고, 그 항목의 서술은 두 쪽에 그쳤다.
반대편의 기록은 대부분 소실되었다. 남부 고지의 교구 대장과 지방 행정 문서는 1884년 여름 진격 과정에서 상당수가 불탔고, 남은 것도 전후 왕당파 관련 문건이 몰수·폐기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오늘날 이 시기 남부 고지의 사정을 알 수 있는 자료는 교회 매장 기록, 의사와 성직자의 개인 일지, 그리고 전후 대륙으로 망명한 인사들이 남긴 회고록 정도다.
그 결과 양측의 숫자는 크게 어긋난다. 조사단 보고서가 제시한 민간인 사망자는 1만 명 안팎이었으나, 20세기 중반 이후 교구 매장 기록을 대조한 연구들은 그보다 훨씬 큰 수치를 제시한다. 오늘날 통용되는 1만 7천 명이라는 추정도 확정된 것이 아니며, 연구자에 따라 두 배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어느 쪽 기록도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 분야의 일반적인 전제다.
9.1. 남부 고지 봉쇄와 아사 [편집]
1883년 4월 에드거 몰리뉴가 선포한 남부 고지 연안 봉쇄는 군사적으로 대단히 효율적이었다. 무기와 탄약의 유입이 끊겼고, 그해 겨울부터 왕당파의 전투력은 급격히 떨어졌다.
문제는 남부 고지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는 땅이었다는 데 있었다. 고지대의 경작지는 좁고 척박했으며, 주민 다수는 목축과 어업에 의존하면서 곡물을 외부에서 들여왔다. 그 유입 경로가 바다와 벨포르 방면 육로였는데, 개전과 함께 둘 다 막혔다.
봉쇄가 곡물까지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양측의 설명이 다르다. 의회파는 봉쇄 대상이 군수품에 한정되었으며 식량 선박은 검사 후 통과시켰다고 주장했다. 왕당파와 남부 고지 측은 사실상 모든 선박이 나포되거나 회항당했다고 기록했다. 남아 있는 해군 나포 기록에는 곡물 화물선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나, 그 화물이 민간용인지 군용인지를 판별하는 기준 자체가 봉쇄를 집행하는 함장의 재량이었다.
1883년에서 188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 가장 참혹했다. 그해 남부 고지의 수확은 평년을 밑돌았고, 왕당파 군대가 현지 징발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민간의 몫은 더 줄었다. 이 시기 교구 기록에는 아사와 동사, 그리고 영양 결핍에 뒤따른 열병으로 인한 사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사망자 다수는 노인과 유아였다.
이 겨울의 피해 규모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조사단은 이를 흉작과 왕당파의 징발 탓으로 돌렸고, 봉쇄와의 인과는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0세기 이후의 연구들은 봉쇄가 없었다면 이 정도 규모의 사망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몰리뉴가 이 결과를 예견했는지, 예견했다면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의회파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없지는 않았다. 1884년 2월 국방위원회 회의록에는 봉쇄의 인도적 완화를 요구하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으나, 위원회는 이를 부결했다. 부결 사유는 식량과 군수품을 구분할 실효적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3월 남부 고지 교구들이 대주교를 통해 제출한 구호 요청도 회신 없이 처리되었다.
전후 몰리뉴는 어떤 조사도 받지 않았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1889년 사망할 때까지 해군에서 예우를 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본격적으로 재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남부 고지 출신 역사학자들이 교구 기록을 발굴하면서부터였다.
문제는 남부 고지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는 땅이었다는 데 있었다. 고지대의 경작지는 좁고 척박했으며, 주민 다수는 목축과 어업에 의존하면서 곡물을 외부에서 들여왔다. 그 유입 경로가 바다와 벨포르 방면 육로였는데, 개전과 함께 둘 다 막혔다.
봉쇄가 곡물까지 대상으로 삼았는지에 대해서는 양측의 설명이 다르다. 의회파는 봉쇄 대상이 군수품에 한정되었으며 식량 선박은 검사 후 통과시켰다고 주장했다. 왕당파와 남부 고지 측은 사실상 모든 선박이 나포되거나 회항당했다고 기록했다. 남아 있는 해군 나포 기록에는 곡물 화물선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나, 그 화물이 민간용인지 군용인지를 판별하는 기준 자체가 봉쇄를 집행하는 함장의 재량이었다.
1883년에서 1884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이 가장 참혹했다. 그해 남부 고지의 수확은 평년을 밑돌았고, 왕당파 군대가 현지 징발로 식량을 확보하면서 민간의 몫은 더 줄었다. 이 시기 교구 기록에는 아사와 동사, 그리고 영양 결핍에 뒤따른 열병으로 인한 사망이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사망자 다수는 노인과 유아였다.
이 겨울의 피해 규모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조사단은 이를 흉작과 왕당파의 징발 탓으로 돌렸고, 봉쇄와의 인과는 인정하지 않았다. 반면 20세기 이후의 연구들은 봉쇄가 없었다면 이 정도 규모의 사망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데 대체로 동의한다. 다만 몰리뉴가 이 결과를 예견했는지, 예견했다면 어느 시점부터였는지는 여전히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의회파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없지는 않았다. 1884년 2월 국방위원회 회의록에는 봉쇄의 인도적 완화를 요구하는 발언이 기록되어 있으나, 위원회는 이를 부결했다. 부결 사유는 식량과 군수품을 구분할 실효적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3월 남부 고지 교구들이 대주교를 통해 제출한 구호 요청도 회신 없이 처리되었다.
전후 몰리뉴는 어떤 조사도 받지 않았다. 그는 전쟁 영웅으로 대우받았고 1889년 사망할 때까지 해군에서 예우를 받았다. 그에 대한 평가가 본격적으로 재검토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 남부 고지 출신 역사학자들이 교구 기록을 발굴하면서부터였다.
9.2. 양측의 보복 [편집]
왕당파의 행위는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조사단 보고서가 이 항목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기록에 남은 유형은 다음과 같다.
기록에 남은 유형은 다음과 같다.
- 점령지 주민에 대한 처형 — 1883년 여름 왕당파가 남부 고지 접경 도시들을 점령하면서 의회 지지를 표명했던 시의원과 언론인, 조합 간부를 처형하거나 구금했다. 중립을 선언했던 도시들에서 특히 피해가 컸다.
- 비국교회 교단에 대한 탄압 — 독립파와 침례파 예배당이 폐쇄되고 목사들이 추방되었다. 이는 종교 갈등이라기보다 이들 교단이 의회파의 조직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 강제 징발 — 점령지에서 곡물과 가축을 대가 없이 징발했다. 이 조치는 왕당파 자체의 보급난이 심해질수록 가혹해졌다.
의회파의 행위는 기록이 훨씬 부실하다. 다만 여러 경로의 단편적 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확인된다.
- 1884년 남부 고지 진격 과정의 방화 — 진격군은 왕당파 은신처로 의심되는 마을과 농가를 소각했다. 조사단은 이를 군사적 필요에 따른 조치로 분류하고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 점령 후의 처형 — 왕당파에 협력한 지역 유력자에 대한 즉결 처형이 있었다는 증언이 다수 남아 있으나, 공식 기록에는 재판을 거친 사례만 집계되었다.
- 전후 유형(流刑) — 약 2,300명이 유형에 처해졌다는 것이 공식 수치이나, 유형지에서의 사망률과 실제 이송 인원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두 진영의 기록 태도는 대칭적이지 않았다. 왕당파는 패배했으므로 자신들의 행위를 축소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고, 남은 기록은 대부분 상대편이 수집한 것이다. 의회파는 승리했으므로 무엇을 기록하고 무엇을 기록하지 않을지를 결정할 수 있었다. 오늘날 이 전쟁의 잔학 행위가 왕당파 쪽에 편중되어 알려져 있는 것은 실제로 그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록의 비대칭 때문이기도 하다.
이 문제가 공론화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루이나 제1공화국과 그 이후의 공식 서사에서 계승전쟁은 민주주의가 왕정의 사유화를 저지한 사건으로 서술되었고, 그 서사에서 봉쇄와 진격의 대가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남부 고지에서 이 시기가 "굶주린 겨울"로 불리며 구전으로 전해져 온 것과 국가 서사 사이의 간극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메워지지 않았다.
10. 결과 [편집]
10.1. 전후 처리 [편집]
1885년 2월 11일 카엘몬트 성이 함락되고 아델하이트가 항구에서 체포되면서 조직적 저항은 끝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과 나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별개였다. 이 시점에 루이나에는 여전히 왕이 없었고, 정당한 사법 체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합의도 없었으며, 남부 고지 전역은 행정이 마비된 상태였다.
① 무장 해제와 항복 조건
의회군 총사령관 리처드 A. 손힐이 2월 14일 발표한 「남부 고지 무장 해제 포고」는 세 가지를 규정했다. 왕당파 부대는 3월 1일까지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한다. 지휘관 이상은 지정된 장소에 출두해 신원을 등록한다. 이에 응한 자에 대해서는 사형을 구형하지 않는다.
마지막 조항은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5만 명이 넘는 왕당파 병력을 전부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게 할 경우 남부 고지에서 저항이 무한정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 병사와 하급 장교는 등록 절차만 거치고 귀향했다. 처벌은 지휘부와 문민 주동자에 한정되었다.
② 사법 체계의 복구
가장 시급한 문제는 1883년 2월의 사법 분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2년간 두 개의 사법 체계가 각자 판결을 내려 왔고, 그 판결들의 효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남아 있었다.
3월 9일 의회가 통과시킨 「사법 정상화에 관한 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무장 해제와 항복 조건
의회군 총사령관 리처드 A. 손힐이 2월 14일 발표한 「남부 고지 무장 해제 포고」는 세 가지를 규정했다. 왕당파 부대는 3월 1일까지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한다. 지휘관 이상은 지정된 장소에 출두해 신원을 등록한다. 이에 응한 자에 대해서는 사형을 구형하지 않는다.
마지막 조항은 대단히 중요한 결정이었다. 5만 명이 넘는 왕당파 병력을 전부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렇게 할 경우 남부 고지에서 저항이 무한정 이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다수 병사와 하급 장교는 등록 절차만 거치고 귀향했다. 처벌은 지휘부와 문민 주동자에 한정되었다.
② 사법 체계의 복구
가장 시급한 문제는 1883년 2월의 사법 분열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2년간 두 개의 사법 체계가 각자 판결을 내려 왔고, 그 판결들의 효력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가 남아 있었다.
3월 9일 의회가 통과시킨 「사법 정상화에 관한 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1883년 2월 9일 이후 남부 고지 순회재판소가 내린 모든 결정은 소급하여 무효로 한다
- 다만 형사·민사를 불문하고 통상적 사건에 대한 판결은 예외로 하여 효력을 인정한다
- 토머스 오스굿이 발부한 체포 영장은 발부 시점부터 무효였던 것으로 본다
- 아르망 델롱의 판사직 박탈 칙령은 효력이 없으며, 그는 판사직을 상실한 바 없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조항이 대칭적이지 않다는 점은 당대에도 지적되었다. 왕당파 판사의 결정은 소급 무효, 공화파 판사에 대한 왕비의 처분은 애초에 무효. 승자의 법이라는 비판이 나왔으나, 의회는 국왕 부재 시 칙령을 발할 자격이 없는 자의 처분과 정당하게 임명된 판사의 결정은 성질이 다르다고 답했다.
③ 왕실 재산과 채무
라이너 폰 슈트라흐가 대륙 은행에서 왕실 사유 재산을 담보로 차입한 자금이 문제가 되었다. 의회는 1883년 9월 「전시 채무 처리에 관한 법」에서 왕실 채무의 승계를 이미 보장한 바 있었으므로, 이 원칙을 유지했다. 다만 전쟁 수행에 직접 사용된 차입금은 승계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대륙 은행들은 이의를 제기했으나 실효적 수단이 없었다.
왕실 사유 재산 자체는 1885년 8월 「왕실 재산 처리에 관한 법」에 따라 국유화되었다. 윈드미어 궁과 카엘몬트 성을 포함한 주요 부동산이 국가에 귀속되었고, 미술품과 장서는 국립박물관과 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④ 남부 고지의 군정
남부 고지는 1885년 2월부터 1886년 6월까지 16개월간 군정 아래 놓였다. 행정 조직이 사실상 붕괴한 상태였고, 기근의 여파로 사회 질서가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의회는 구호 식량을 대규모로 투입했으나, 이는 뒤늦은 조치였다는 비판을 오래 받았다.
군정은 예정보다 두 차례 연장되었다가 1886년 6월 종료되었다. 국방위원회가 개전 첫 달에 결정한 신설 부대의 6개월 내 해산 원칙은 이 군정 때문에 지켜지지 못했으나, 1887년까지 단계적으로 이행되었다.
10.2. 재판 [편집]
전후 재판은 1885년 4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다. 재판을 담당한 기구는 의회가 설치한 국사재판소(High Court of the Realm)로, 재판관 9명 가운데 5명이 현직 판사, 4명이 의원이었다.
이 구성 자체가 논란이었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한 특별 고등법원도 같은 방식이었고, 왕당파는 이를 두고 의회가 238년 전의 전례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의회는 이번 피고인이 국왕이 아니라 왕비와 참칭자,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므로 성질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재판의 법적 근거는 「내란 및 대권 참칭에 관한 특별법」(1885년 3월 21일 제정)이었다. 이 법은 세 가지 죄를 규정했다.
이 구성 자체가 논란이었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한 특별 고등법원도 같은 방식이었고, 왕당파는 이를 두고 의회가 238년 전의 전례를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의회는 이번 피고인이 국왕이 아니라 왕비와 참칭자, 그리고 그 추종자들이므로 성질이 다르다고 반박했다.
재판의 법적 근거는 「내란 및 대권 참칭에 관한 특별법」(1885년 3월 21일 제정)이었다. 이 법은 세 가지 죄를 규정했다.
- 제1조 (대권 참칭) — 국왕이 아닌 자가 국왕의 대권에 속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권한을 자칭한 경우
- 제2조 (내란) — 의회의 정당한 의결에 무력으로 저항하거나 그러한 저항을 조직·지휘·지원한 경우
- 제3조 (참칭 옹립) — 계승권 없는 자를 국왕으로 선포하거나 그 선포에 가담한 경우
소급 입법이라는 비판이 즉각 제기되었다. 의회는 이 법이 새로운 죄를 만든 것이 아니라 기존의 반역죄를 이 사안에 맞게 세분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이 논점은 오늘날까지 이 재판의 정당성을 둘러싼 핵심 쟁점으로 남아 있다.
10.2.1. 아델하이트 [편집]
루이나 인민의 이름으로 고발한다.
아델하이트 폰 하르슈타트는 선왕 에드먼드 3세의 배우자로서 이 나라에 왔고, 왕비로서 마땅한 예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받은 것은 예우였지 권한이 아니었다. 이 왕국의 어떤 법도 국왕의 배우자에게 통치의 자격을 부여한 바 없으며, 국왕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그는 1882년 12월 스스로를 왕태후 겸 섭정이라 칭하고, 이 나라의 어떤 기구도 부여한 바 없는 자격으로 국왕을 세우려 하였다. 그가 세우려 한 자는 1689년 이래 이 왕국의 계승 질서에서 벗어나 있던 계열의 후손이었으며, 이 나라의 말을 하지 못하고 이 땅을 밟은 적이 없는 자였다.
1883년 2월 2일 의회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한다고 의결하였을 때, 그는 국왕이 없는 자리에서 국왕의 이름으로 의회를 해산한다고 선언하였다. 왕이 없는 나라에서 왕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뜻이 법으로 관철되지 아니하자 무기를 들었다. 그로부터 3년 동안 이 땅에서 죽은 사람의 수를 이 법정은 낱낱이 헤아리지 아니하겠다. 남부 고지의 겨울에 굶어 죽은 아이들까지 헤아린다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정은 아델하이트 폰 하르슈타트를,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권한을 자칭한 자로서, 그 자칭을 관철하기 위하여 이 왕국에 전쟁을 일으킨 자로서 고발한다.
변론
아델하이트는 변론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법정의 관할권을 인정했고, 통역을 거절하고 루이나어로 직접 진술했다. 그의 항변은 세 가지였다.
첫째, 자신은 왕정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왕위가 열 달 넘게 비어 있었고 의회는 계승자를 정하지 못했으며, 그 상태가 계속되면 왕정 자체가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둘째, 왕이 없는 나라에 왕을 세우려 한 것이 어떻게 왕에 대한 반역이 되는가. 반역이란 왕에 대한 죄인데, 이 나라에는 배신할 왕이 없었다.
셋째, 자신이 뮈롱의 계승권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1689년 의회가 그 계열의 계승권을 박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권리가 남아 있었을 뿐이며,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193년 전 의회의 잘못이다.
두 번째 항변이 재판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검찰 측은 반역의 대상이 국왕 개인이 아니라 국가이며, 국왕을 세울 권한을 가진 기구를 무력으로 짓밟은 것이 곧 국가에 대한 반역이라고 반박했다.
판결
1885년 7월 3일 국사재판소는 세 죄목 모두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고, 같은 달 11일 형을 선고했다. 판결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루이나 국사재판소 1885년 국(國)제3호
피고인 아델하이트 폰 하르슈타트
죄명 대권 참칭, 내란, 참칭 옹립
주문
I. 피고인을 세 죄목 모두에 대하여 유죄로 인정한다.
II. 피고인을 종신 국외 추방에 처한다.
III. 피고인이 루이나 국내에 보유한 재산 일체를 몰수한다. 다만 혼인 시 지참한 개인 물품은 예외로 한다.
IV. 피고인이 1882년 12월 11일 이후 왕태후 또는 섭정의 자격으로 발한 모든 문서는 발한 때부터 효력이 없었던 것으로 한다.
이유
제1장 인정되는 사실
본 법정은 다음의 사실을 증거에 의하여 인정한다.
I. 피고인은 1867년 선왕 에드먼드 3세와 혼인하여 왕비가 되었고, 1878년 12월 14일 선왕의 즉위와 함께 그 지위를 유지하였다. 선왕이 1882년 4월 17일 사망함으로써 피고인은 왕비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II. 피고인은 1882년 8월 하르슈타트 공가에 서신을 보내 가문이 보관한 혼인 기록의 사본을 요청하였다. 본 법정은 피고인과 하르슈타트 공가 사이에 오간 서한 47통을 증거로 채택하였으며, 그중 8월 21일자 서한에 "왕위계승특별위원회는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그 전에 다른 길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는 문구가 있음을 확인한다.
III. 피고인은 1882년 10월 조사원을 통하여 벨덴에 거주하던 가스파르 뮈롱을 찾아내었고, 같은 해 12월 3일 그를 루이나로 입국시켜 카엘몬트 성에 유숙하게 하였다.
IV. 피고인은 1882년 12월 11일 추밀원 잔여 위원들에게 서한을 발하여, 뮈롱의 계승권을 인정하고 「제이머스 3세」로 즉위시킬 것과, 즉위가 이루어질 때까지 피고인이 섭정을 맡을 것을 요구하였다. 본 법정은 이 서한의 원본을 증거로 채택하였다.
V. 피고인은 1882년 12월 하순부터 오를레인 백작을 비롯한 남부 고지 귀족과 육군 남부·서부 관구 지휘관들을 접촉하였다. 같은 시기 왕실 재무관 라이너 폰 슈트라흐는 왕실 사유 재산을 담보로 대륙 은행 두 곳과 차입 교섭을 개시하였으며, 본 법정은 그 교섭 관계 서류 일체를 증거로 채택하였다.
VI. 의회는 1883년 2월 2일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를 가결하여, 뮈롱의 계승권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계승자의 확정은 의회의 입법으로만 이루어지며 어떠한 개인도 국왕의 대권을 행사할 수 없음을 선언하였다.
VII. 피고인은 1883년 2월 9일 카엘몬트 성에서 의회 해산 칙령을 발하였다. 이 칙령에는 국왕의 서명이 없고, 부서한 각료가 없으며, 피고인이 「왕태후 겸 섭정」이라는 직함으로 단독 서명하였다.
VIII. 1883년 3월 2일 왕당파는 카엘몬트 성에서 뮈롱을 국왕으로 선포하였고, 같은 달 하순 무력 충돌이 개시되었다. 이후 1885년 2월 11일까지 계속된 교전으로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제2장 관할에 관한 판단
피고인은 본 법정의 관할을 다투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관할은 당사자의 승낙으로 창설되는 것이 아니므로, 본 법정은 직권으로 이를 판단한다.
본 법정은 1885년 3월 21일 제정된 「내란 및 대권 참칭에 관한 특별법」 제7조에 의하여 설치되었다. 변호인은 이 법이 행위 이후에 제정된 소급 입법이므로 이에 근거한 처벌이 허용되지 아니한다고 주장하였다.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반역은 이 왕국의 법이 오래전부터 처벌하여 온 죄이며, 특별법 제1조 내지 제3조는 새로운 죄를 창설한 것이 아니라 기존 반역죄의 구성 요건을 이 사안에 맞추어 세분한 것이다. 다만 본 법정은, 특별법이 정한 형이 종래의 반역죄보다 무거운 부분에 관하여는 이를 적용하지 아니한다.
제3장 각 죄목에 관한 판단
제1절 대권 참칭 (특별법 제1조)
본조는 국왕이 아닌 자가 국왕의 대권에 속하는 행위를 하거나 그 권한을 자칭한 경우를 처벌한다.
의회의 해산은 이 왕국에서 국왕의 대권에 속한다. 이 점에는 다툼이 없다. 문제는 국왕이 부재한 때에 이를 대행할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가이며, 이를 정한 명문의 규정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피고인은 국왕 부재 시 대권이 왕실에 유보된다고 주장한다. 본 법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아니한다. 첫째, 이 왕국에서 왕실은 법인이 아니며 권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대권은 왕관에 붙는 것이지 왕가에 붙는 것이 아니다. 둘째, 설령 유보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피고인은 왕가의 구성원이 아니라 혼인으로 왕가에 들어온 자이며, 배우자의 사망으로 그 연결은 종료되었다. 셋째,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 제4항이 이미 대권의 정지를 선언한 이상, 그 이후의 대권 행사는 어떤 해석으로도 정당화되지 아니한다.
피고인이 1883년 2월 9일 발한 칙령은 형식과 실질 모두에서 국왕의 대권 행사에 해당한다. 본조의 죄가 성립한다.
제2절 내란 (특별법 제2조)
본조는 의회의 정당한 의결에 무력으로 저항하거나 그러한 저항을 조직·지휘·지원한 경우를 처벌한다.
피고인이 직접 무기를 들거나 부대를 지휘한 사실은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본조는 조직과 지원을 지휘와 나란히 규정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명백하다. 전쟁은 총을 든 자만으로 일어나지 아니한다.
본 법정이 인정한 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은 1882년 12월 하순부터 무력에 의한 관철을 준비하였다. 남부 고지 귀족 및 육군 관구 지휘관과의 접촉이 그러하고, 왕실 재산을 담보로 한 대륙 은행 차입 교섭이 그러하다. 특히 차입 교섭은 의회의 결의가 있기 두 달 전에 개시되었으며, 그 용도가 통상적 왕실 지출로는 설명되지 아니한다.
변호인은 이 준비들이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방어를 준비하는 자는 상대가 먼저 움직인 뒤에 준비한다. 피고인은 의회가 무엇을 결의할지 알기 전에 준비하였다. 본조의 죄가 성립한다.
제3절 참칭 옹립 (특별법 제3조)
본조는 계승권 없는 자를 국왕으로 선포하거나 그 선포에 가담한 경우를 처벌한다.
먼저 가스파르 뮈롱에게 계승권이 있었는지를 판단한다. 변호인은 1689년 왕위협약이 제이머스 2세의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후손의 청구권이 존속한다고 주장한다.
본 법정은 그 문언 해석 자체는 다투지 아니한다. 왕위협약은 국왕이 통치를 포기하여 왕위가 비었다는 법리를 택하였고, 계승권 박탈 조항을 두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계승 순위는 하나의 문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법률이 겹쳐 이루는 질서다.
1711년 개신교 계승법은 계승 순위를 새로이 확정하면서, 그 순위에 열거되지 아니한 계열의 청구권을 배제하였다. 1801년 왕위 계승 순위 확인법은 이 순위를 재확인하고 산정 방식을 규정하였다. 뮈롱의 계열은 이 두 법률 어디에도 열거되어 있지 아니하다. 따라서 그의 청구권은 1689년에 박탈된 것이 아니라 1711년에 대체된 것이며, 결과에 있어서는 다르지 아니하다.
나아가 뮈롱의 계열은 개종하지 아니한 가톨릭 계열로서 개신교 계승법의 배제 대상에 해당한다. 변호인은 개종 서약으로 이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 같은 법은 배제 사유의 사후적 치유를 규정하지 아니하였다.
다음으로 피고인이 선포에 가담하였는지를 판단한다. 피고인은 뮈롱을 찾아내고 입국시켜 유숙하게 하였으며, 그의 즉위를 추밀원에 요구하였고, 선포가 이루어진 장소를 제공하였다. 선포일에 현장에 있었는지는 문제되지 아니한다. 본조의 죄가 성립한다.
제4장 피고인의 항변에 관한 판단
제1절 왕정 수호의 항변
피고인은 자신이 왕정을 지키려 하였을 뿐이라고 진술한다. 본 법정은 이 진술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아니한다. 피고인이 사익을 위하여 움직였다고 볼 만한 증거는 제출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동기는 행위를 설명할 뿐 정당화하지 아니한다. 왕정을 지키기 위하여 왕을 세우는 절차를 짓밟는 것은, 집을 지키기 위하여 주춧돌을 빼내는 일과 다르지 아니하다.
제2절 왕 없는 반역의 항변
피고인은 다음과 같이 항변하였다. "왕이 없는 나라에 왕을 세우려 한 것이 어떻게 왕에 대한 반역이 되는가. 반역이란 왕에 대한 죄인데, 이 나라에는 배신할 왕이 없었다."
본 법정이 가장 오래 숙고한 문제가 이것이다. 본 법정은 이 항변이 진지한 것이며 가볍게 물리칠 수 없다고 본다.
검찰은 반역의 대상이 국왕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고 답하였다. 본 법정은 이 답이 옳으나 충분하지 아니하다고 본다. 국가라는 말은 너무 넓어 무엇이든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법정은 다음과 같이 판단한다.
이 왕국에서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1372년 벨포르에 모인 귀족과 성직자와 도시의 대표들이 알드리크에게 왕관을 주었고, 그 뒤로 다섯 왕가가 바뀌는 동안에도 이 절차는 형태를 달리하며 이어져 왔다. 1493년에도, 1603년에도, 1689년에도 왕관은 언제나 주어진 것이었다. 이 나라의 왕은 언제나 주어진 왕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없는 때에도 이 왕국에는 배신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다. 왕을 줄 수 있는 권한, 그리고 그 권한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한 오래된 약속이다. 왕위가 비어 있다는 것은 그 약속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속만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피고인이 무너뜨린 것은 왕이 아니라 그 약속이었다. 그리고 왕은 죽으면 다시 세울 수 있으나 그 약속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기 어렵다는 점에서, 피고인의 행위는 왕을 시해하는 것보다 가볍지 아니하다.
항변을 배척한다.
제3절 1689년 책임 전가의 항변
피고인은 자신이 뮈롱의 계승권을 발명한 것이 아니며, 잘못이 있다면 계승권을 박탈하지 아니한 1689년 의회의 잘못이라고 항변한다.
본 법정은 1689년 의회가 이 빈틈을 남겼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당시 의회는 국왕을 재판하지 아니하려는 신중함에서 폐위 대신 왕위 공백의 법리를 택하였고, 그 선택이 193년 뒤 다툼의 빌미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문에 잠금장치가 없다는 사실이 들어간 자를 면책하지 아니한다. 더욱이 피고인은 그 문이 열려 있음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열려 있는 문을 찾기 위하여 여덟 달을 들여 계보를 뒤졌다.
항변을 배척한다.
제5장 양형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였다. 본 법정은 다음의 사정을 고려하여 이를 채택하지 아니한다.
I. 피고인이 직접 무기를 들거나 살상을 명한 사실은 인정되지 아니한다.
II. 피고인의 동기에 사익이 개입한 증거가 없다.
III. 피고인은 외국 왕실 출신으로서, 그 처형이 초래할 대외적 결과를 본 법정은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다.
IV. 본 법정은 1647년의 전례를 상기한다. 그때 이 나라는 왕을 재판하여 처형하였고, 그 결과 죽은 자는 순교자가 되고 그의 이름은 이후 두 세기 동안 이 왕국을 흔들었다. 형벌이 그 대상을 오히려 강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음을 본 법정은 안다.
이에 피고인을 종신 국외 추방에 처한다. 피고인은 판결 확정일로부터 30일 이내에 이 왕국을 떠나야 하며, 어떠한 명목으로도 다시 입국할 수 없다. 위반 시 형은 종신 구금으로 전환된다.
제6장 소수의견
재판관 아홉 명 가운데 일곱 명이 위 판단에 찬성하였다. 두 명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재판관 마르셀 뒤보아는 양형에 반대한다. 본건으로 죽은 자가 수만 명에 이르는데 그 책임의 정점에 있는 자를 국외로 내보내는 것에 그친다면, 이 법정은 죽은 자들에게 무엇이라 답할 것인가. 대외적 고려는 형벌의 사유가 될 수 없다.
재판관 헨리 콜빌은 제3장 제3절의 판단에 반대한다. 계승권의 존부는 법률의 해석 문제이며, 이는 1882년 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한 바로 그 쟁점이다. 당시 정치 기구가 답하지 못한 물음에 이제 와서 법정이 답하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일이다. 다수의견은 1711년 법이 1689년의 빈틈을 메웠다고 하나, 그렇다면 1882년에 그 답이 이토록 어려웠을 리 없다.
10.2.2. 가스파르 뮈롱 [편집]
기소
가스파르 뮈롱에 대한 재판은 1885년 5월 6일 시작되었다. 적용 죄목은 제3조 참칭 옹립과 제2조 내란이었다. 제1조 대권 참칭은 적용되지 않았는데, 그가 실제로 대권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소 단계에서부터 검찰 내부에 이견이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문서는 수백 건에 이르렀으나 그가 직접 서명한 것은 소수였고, 그마저도 내용을 이해하고 서명했는지가 불분명했다. 기소문은 상당히 짧았다.
가스파르 뮈롱에 대한 재판은 1885년 5월 6일 시작되었다. 적용 죄목은 제3조 참칭 옹립과 제2조 내란이었다. 제1조 대권 참칭은 적용되지 않았는데, 그가 실제로 대권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소 단계에서부터 검찰 내부에 이견이 있었다.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문서는 수백 건에 이르렀으나 그가 직접 서명한 것은 소수였고, 그마저도 내용을 이해하고 서명했는지가 불분명했다. 기소문은 상당히 짧았다.
가스파르 뮈롱은 1883년 3월 2일 카엘몬트 성에서 이 왕국의 국왕 제이머스 3세로 선포되었다. 그는 그 자리를 거부하지 아니하였고, 이후 2년간 그의 이름으로 군대가 움직이고 사람이 죽었다.
이 법정이 물어야 할 것은 그가 무엇을 하였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지 아니하였는가이다.
심리
재판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뮈롱은 통역을 통해 진술했으며, 그의 답변은 일관되게 짧고 단순했다.
그는 자신이 왕관을 원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벨덴에서 조선소 일을 하고 있었고, 어느 날 사람들이 찾아와 자신이 왕의 후손이라 했으며, 배를 타고 와 보니 성에 있었다고 말했다. 거부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고 답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사람이 죽은 것을 알았느냐는 질문에는, 나중에 알았다고 답했다.
재판 과정에서 그가 서명한 문서 가운데 다수가 대필이었다는 사실, 그가 참석한 군사 회의에서 발언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카엘몬트 성 밖으로 나간 것이 2년간 네 차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판결
1885년 6월 29일, 국사재판소는 두 죄목 모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법정은 피고인이 무죄임을 선고한다.
제3조는 계승권 없는 자를 국왕으로 선포하거나 그 선포에 가담한 자를 처벌한다. 그러나 선포된 자가 선포에 가담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이 법정은 그렇지 않다고 판단한다. 그는 선포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었다.
제2조는 무력 저항을 조직하거나 지휘하거나 지원한 자를 처벌한다. 이 법정은 피고인이 그중 어느 것도 하지 아니하였음을 확인하였다.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문서는 그의 손으로 쓰인 것이 아니었고, 그의 이름으로 내려진 명령은 그의 뜻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이 법정은 피고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나, 이 결론이 위안이 되지 아니한다는 점을 함께 적는다. 2년 동안 한 사람의 이름이 수만 명을 죽이는 데 쓰였고, 그 이름의 주인은 그것을 막을 수도 도울 수도 없었다. 이 법정이 처벌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지 그러한 사정이 아니다.
피고인을 방면한다.
뮈롱은 그해 여름 벨덴으로 돌아갔다. 조선소에 복직해 12년을 더 일하다 1898년 후사 없이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카엘몬트 왕조 망명 계열의 남계는 완전히 끊겼다.
이 판결은 당대에도 논란이었다. 왕당파 잔존 세력은 이를 두고 의회가 자신들이 세운 왕을 왕으로조차 인정하지 않은 모욕이라 여겼고, 일부 의회파 강경론자들은 6만 명이 죽은 전쟁에서 그 이름의 주인이 아무 책임도 지지 않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10.2.3. 은사슴단 지도부 [편집]
기소와 심리
지도부에 대한 재판은 1885년 5월부터 9월까지 병합 심리로 진행되었다. 기소된 인원은 47명이었으며, 대상은 왕위수호동맹 창립 서명자 가운데 군 지휘관과 문민 주동자, 그리고 왕당파 정부에서 직책을 맡았던 인사들이었다.
기소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지도부에 대한 재판은 1885년 5월부터 9월까지 병합 심리로 진행되었다. 기소된 인원은 47명이었으며, 대상은 왕위수호동맹 창립 서명자 가운데 군 지휘관과 문민 주동자, 그리고 왕당파 정부에서 직책을 맡았던 인사들이었다.
기소는 세 갈래로 나뉘었다.
- 제1군 (17명) — 1883년 1월 왕위수호동맹 창립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이후 지휘·정책 결정에 참여한 자
- 제2군 (21명) — 무장 저항을 지휘하거나 자금·물자를 조달한 자
- 제3군 (9명) — 점령지에서의 처형과 탄압에 직접 관여한 자
오를레인 백작은 1884년 12월 남부 고지 방어전에서 전사하여 기소되지 않았다. 라이너 폰 슈트라흐는 제2군으로 기소되었으며, 대륙 은행 차입을 주선한 행위가 핵심 혐의였다.
판결
이 법정은 피고인들이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음을 부정하지 아니한다. 이 나라에서 왕위는 혈통을 따라 이어져 왔고, 그 믿음은 500년 동안 옳았다. 피고인들이 그 믿음을 버리지 아니한 것을 이 법정은 어리석다고 말하지 아니한다.
그러나 신념은 행위를 설명할 뿐 정당화하지 아니한다. 피고인들은 자신의 믿음이 법으로 관철되지 아니하자 법을 버리고 무기를 들었다. 이 나라에는 그 다툼을 해결할 기구가 있었고, 그 기구는 열려 있었으며, 피고인들 가운데 다수는 그 기구의 구성원이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그 믿음을 다툴 수 있는 유일한 자리를 부수는 것은, 지키려는 것을 스스로 없애는 일이다.
1885년 9월 14일 선고된 형은 다음과 같았다.
- 사형 11명 — 제1군 가운데 7명과 제3군 전원의 일부. 10월에 집행되었다
- 종신 유형 34명 — 대륙령 유형지로 이송
- 무죄 2명 — 창립에 이름만 올리고 이후 활동이 확인되지 않은 성직자 2명
한편 왕당파 병사와 하급 장교에 대해서는 「남부 고지 무장 해제 포고」에 따라 형사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유형에 처해진 인원은 공식 수치로 약 2,300명이며, 여기에는 재판을 거치지 않은 행정 처분 대상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유형지에서의 사망률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11. 왕위의 소멸 [편집]
11.1. 1885년 벨포르 추대회의 [편집]
소집까지
전쟁이 끝난 1885년 2월 시점에도 벨포르 연합 다수는 새 왕을 세울 생각이었다. 3년간 싸운 명분이 "왕비가 아니라 의회가 왕을 세운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제 그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세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2년에 교착을 낳았던 사정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대륙의 린데나우가 방계들은 3년 사이 루이나와 더 멀어졌으며, 그중 두 명은 전쟁 기간에 왕당파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3월과 4월에 걸쳐 의회는 후보 검토를 재개했으나 6월 이전에 결론을 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 사이에 정치적 조건이 바뀌었다. 첫째, 3년 내전을 겪은 여론이 왕정 자체에 냉담해져 있었다. 둘째, 남부 고지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왕관 하나 때문에 6만 명이 죽었다"는 인식이 퍼졌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델하이트 재판의 판결문이 4월부터 인쇄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판결문 제4장 제2절의 논지 — 이 왕국의 왕은 언제나 주어진 왕이었고, 왕을 줄 수 있는 권한은 대표기구에 있다 — 는 왕비를 유죄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읽는 사람들은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줄 수 있는 자는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4월 하순 의회 안에서 추대회의 소집이 처음 제안되었다. 취지는 명확했다. 왕을 세우는 일은 통상적 입법이 아니라 1372년에 그러했듯 귀족과 성직자, 도시 대표가 함께 모여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절차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제안이었으나, 실제로는 의회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을 넓은 기구에 넘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5월 2일 의회는 「추대회의 소집에 관한 법」을 가결했다.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전쟁이 끝난 1885년 2월 시점에도 벨포르 연합 다수는 새 왕을 세울 생각이었다. 3년간 싸운 명분이 "왕비가 아니라 의회가 왕을 세운다"는 것이었으므로, 이제 그 권한을 실제로 행사하는 일만 남았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세울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1882년에 교착을 낳았던 사정이 하나도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되어 있었다. 대륙의 린데나우가 방계들은 3년 사이 루이나와 더 멀어졌으며, 그중 두 명은 전쟁 기간에 왕당파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 후보에서 제외되었다. 3월과 4월에 걸쳐 의회는 후보 검토를 재개했으나 6월 이전에 결론을 낼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이 사이에 정치적 조건이 바뀌었다. 첫째, 3년 내전을 겪은 여론이 왕정 자체에 냉담해져 있었다. 둘째, 남부 고지의 참상이 알려지면서 "왕관 하나 때문에 6만 명이 죽었다"는 인식이 퍼졌다. 셋째,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아델하이트 재판의 판결문이 4월부터 인쇄물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판결문 제4장 제2절의 논지 — 이 왕국의 왕은 언제나 주어진 왕이었고, 왕을 줄 수 있는 권한은 대표기구에 있다 — 는 왕비를 유죄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나, 읽는 사람들은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줄 수 있는 자는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4월 하순 의회 안에서 추대회의 소집이 처음 제안되었다. 취지는 명확했다. 왕을 세우는 일은 통상적 입법이 아니라 1372년에 그러했듯 귀족과 성직자, 도시 대표가 함께 모여 결정할 사안이라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절차의 정통성을 높이기 위한 제안이었으나, 실제로는 의회 단독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결정을 넓은 기구에 넘기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5월 2일 의회는 「추대회의 소집에 관한 법」을 가결했다.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하원 의원 전원 452명
- 상원 의원 가운데 전쟁 중 왕당파에 가담하지 않은 자 211명
- 도시 대표 88명 — 인구 2만 이상 도시에서 각 1~3명
- 남부 고지 대표 24명 — 군정 아래 있던 지역에서 별도로 선출
총 819명이었다. 남부 고지 대표를 포함시킨 것은 논란이 되었으나, 패전 지역을 배제한 채 내린 결정은 정통성을 갖지 못한다는 반론이 우세했다.
회의
1885년 5월 18일, 벨포르 의사당 대회의장에서 추대회의가 개회되었다. 1372년 알드리크 1세를 추대한 이래 513년 만의 소집이었다.
의장은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맡았다. 개회 선언 직후 그는 회의의 권한이 무엇인지를 먼저 확정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 절차가 이후 나흘을 소모했다. 쟁점은 추대회의가 왕을 세우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는가였다.
찬성 측 논리는 이러했다. 1372년 이 회의가 왕관을 준 것이라면 그 회의가 가진 것은 왕을 고를 권한이 아니라 왕관을 처분할 권한이며, 처분에는 주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반대 측 논리는 이러했다. 추대회의는 왕을 세우기 위한 기구이므로 왕을 세우지 않는 결정은 그 기구의 목적을 벗어난다. 왕정의 폐지는 헌정의 근본을 바꾸는 일이므로 별도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5월 22일 표결에서 회의는 자신에게 그 권한이 있음을 확인했다. 찬성 511, 반대 268, 기권 40이었다.
이어 5월 25일부터 사흘간 본안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 토론에서 제출된 안은 세 가지였다.
- 제1안 (계승 유지) — 린데나우가 방계 가운데 한 명을 선정해 즉위시킨다
- 제2안 (왕위 유보) — 왕위를 존치하되 당분간 공석으로 두고 국정은 의회가 대행한다
- 제3안 (왕위 폐지) — 왕위 자체를 소멸시키고 새로운 국가 형태를 정한다
제2안이 예상 밖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다. 결정을 미루자는 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 논거가 결정적이었다. 왕위를 비워 둔 채로 두는 것이야말로 1882년의 상황을 재현하는 일이며, 언젠가 누군가 다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한 의원은 "우리는 빈 왕좌 때문에 3년을 싸웠다. 그 왕좌를 그대로 두고 집에 돌아갈 셈인가"라고 발언했고, 이 문장은 이후 자주 인용되었다.
5월 28일 최종 표결이 실시되었다.
안 | 찬성 |
제1안 (계승 유지) | 189 |
제2안 (왕위 유보) | 137 |
제3안 (왕위 폐지) | 471 |
기권·불참 | 22 |
결의
같은 날 채택된 「왕위에 관한 결의」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루이나 왕국의 귀족과 성직자, 도시와 지방의 대표들이 벨포르에 모여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I. 1372년 이 자리에 모인 우리 선조들은 알드리크에게 왕관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이었으며, 그 뒤로 다섯 왕가가 바뀌는 동안에도 이 왕국의 왕은 언제나 받은 왕이었다.
II. 준 것을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는 준 자뿐이다. 이 회의는 513년 전 왕관을 준 회의와 같은 자격으로 이 자리에 모였음을 확인한다.
III. 이에 이 회의는 루이나 왕국의 왕위를 소멸시킨다. 이 결의가 있는 날로부터 이 왕국에는 왕이 없으며, 어떠한 절차로도 다시 왕을 세울 수 없다.
IV. 왕위에 부속된 모든 대권과 칭호, 문장과 의례는 함께 소멸한다. 루이나 교회의 총관직도 이에 포함된다.
V. 이 결의는 국민의 승인을 얻어 효력을 발한다. 이 회의는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칠 것을 의회에 요청한다.
VI. 우리는 이 결정이 왕들에 대한 판단이 아님을 밝힌다. 510년 동안 이 왕국을 다스린 이들 가운데 훌륭한 자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었다. 우리가 끝내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리이며, 그 자리가 비었을 때 이 나라가 무엇을 겪는지를 우리는 지난 3년간 보았다.
제6항은 마지막까지 논쟁이 되었던 조항이다. 왕정에 대한 규탄을 담자는 주장과 담지 말자는 주장이 갈렸고, 결국 담지 않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이 절제가 이후 왕당파 전통이 순교 서사를 만들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다.
회의는 결의 채택 직후 산회했다. 다시 소집되지 않았고, 소집될 근거도 남지 않았다. 제3항이 왕을 다시 세울 가능성을 봉쇄한 이상, 이 회의의 존재 이유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11.2. 국민투표와 공화국 헌법 [편집]
국민투표
의회는 6월 4일 「국민투표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투표는 두 문항으로 구성되었다.
의회는 6월 4일 「국민투표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투표는 두 문항으로 구성되었다.
- 제1문 — 1885년 5월 28일 추대회의의 「왕위에 관한 결의」를 승인하는가
- 제2문 — 왕위를 대신할 국가 형태로 공화정을 채택하는가
두 문항을 분리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왕정을 끝내는 것과 공화정을 택하는 것은 별개의 결정이며, 전자에는 찬성하되 후자에는 다른 안을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일부 의원들은 선출직 종신 국가원수제나 집단 지도 체제를 대안으로 거론했다.
선거권은 당시 1832년 선거법 및 후속 개정에 따른 남성 유권자로 제한되었다. 여성 참정권 요구가 이 시기에 제기되었으나 반영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오랫동안 제1공화국 성립의 한계로 지적되었다.
투표는 1885년 7월 19일 실시되었다.
문항 | 찬성 | 반대 |
제1문 (왕위 폐지 승인) | 68.4% | 31.6% |
제2문 (공화정 채택) | 61.2% | 38.8% |
투표율은 71%였다. 지역별 편차가 컸다. 내해 연안 공업 지대에서는 제1문 찬성이 80%를 넘었으나, 남부 고지에서는 두 문항 모두 반대가 우세했다. 남부 고지 일부 선거구에서는 투표 자체가 조직적으로 거부되어 투표율이 20%대에 머물렀다.
이 지역 편차는 이후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남았다. 왕당파 전통은 이를 근거로 공화국이 남부 고지의 동의 없이 세워졌다고 주장했고, 공화국 측은 전국 단위 투표에서 다수가 승인한 이상 지역별 결과는 문제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제헌 작업
국민투표 직후 의회는 제헌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 33명 가운데 법률가가 19명이었고, 위원장은 헌법학자 출신 의원 아우구스틴 레미가 맡았다.
제헌 과정의 특징은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왕만 빼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점이다. 위원회는 기존 법률 체계와 행정 조직, 사법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왕위에 관한 조항만 대체하는 방식을 택했다. 조약과 채무, 외교 관계가 그대로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헌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제1조 — 루이나는 공화국이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 제3조 — 어떠한 세습 직위도 국가 권력의 일부가 될 수 없다. 이 조항은 개정할 수 없다
- 제12조 — 국가원수는 대통령으로 하며,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한다. 임기는 4년으로 한다
- 제19조 — 대통령은 의회의 동의 없이 상비 육군의 규모를 늘리거나 그 지휘 계통을 변경할 수 없다
- 제20조 — 군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으며, 어떠한 군인도 현역 상태로 공직에 취임할 수 없다
- 제44조 — 루이나 교회와 국가를 분리한다. 다만 기존 교회 재산과 교구 조직은 존치한다
제3조와 제19조가 이 헌법의 성격을 규정한다. 전자는 왕정 복귀를 영구히 봉쇄한 조항이고, 후자는 내전에서 육군이 왕당파의 주력이었다는 기억이 낳은 조항이다. 특히 제19조와 제20조는 이후 한 세기 가까이 루이나 정치에서 군에 대한 경계의 근거가 되었으며, 1978년 10.10 군사반란이 그토록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이 조항들이 명백히 짓밟혔기 때문이다.
한편 대통령의 권한은 대단히 제한적으로 설계되었다. 왕을 없앤 자리에 다시 강한 1인 권력을 두는 것에 대한 경계가 컸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의회와 내각이 담당했고, 이 구조는 1921년 제2공화국 헌법이 행정부 권한을 확대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헌법안은 1885년 11월 9일 의회를 통과했다.
11.3. 루이나 제1공화국의 출범 [편집]
초대 대통령 선거
첫 대통령 선거는 1885년 12월 실시되었다. 선거 자체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이 크지 않았던 데다 국가의 방향은 이미 국민투표와 제헌 과정에서 정해진 뒤였기 때문이다.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사양했다. 그가 남긴 사양의 변은 이후 자주 인용된다. 전쟁을 이끈 사람이 그 전쟁으로 생긴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신은 의회로 돌아가겠다는 취지였다.
1886년 1월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루이나 제1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
국가 상징의 정리
왕위 소멸에 따라 국가 상징 전반이 재정비되었다.
첫 대통령 선거는 1885년 12월 실시되었다. 선거 자체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는데,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이 크지 않았던 데다 국가의 방향은 이미 국민투표와 제헌 과정에서 정해진 뒤였기 때문이다.
코르넬리스 밴 하이트가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사양했다. 그가 남긴 사양의 변은 이후 자주 인용된다. 전쟁을 이끈 사람이 그 전쟁으로 생긴 자리에 앉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신은 의회로 돌아가겠다는 취지였다.
1886년 1월 초대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루이나 제1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
국가 상징의 정리
왕위 소멸에 따라 국가 상징 전반이 재정비되었다.
- 문장 — 참나무와 은사슴, 물수리로 이루어진 왕실 문장은 국가 상징에서 제외되었다. 다만 파괴되지는 않았고, 벨포르 대성당과 옛 왕궁 건물의 조각과 부조는 그대로 남았다. 새 국장은 1887년 제정되었다
- 국기 — 왕실 색인 뽕나무빛을 제외하고 남색과 금색을 기본으로 하는 새 국기가 채택되었다
- 왕실 재산 — 윈드미어 궁은 대통령 관저가 아니라 국립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왕이 살던 곳에 국가원수를 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른 것이다
- 교회 — 국왕이 겸하던 루이나 교회 총관직이 소멸하면서 교회는 자치 기구를 구성했고, 1885년 헌법 제44조에 따라 국가와 분리되었다
연속성의 문제
제1공화국은 스스로를 새 국가가 아니라 같은 국가로 규정했다. 전쟁 중 벨포르 연합이 어떤 나라의 승인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여기서 효력을 발휘했다. 공화국은 1885년 이후 어떤 나라와도 새로 국교를 수립하지 않았으며, 조약과 채무, 재외 공관과 영사 조직이 그대로 이어졌다.
이 원칙은 국내적으로도 적용되었다. 법률의 연호 표기만 바뀌었을 뿐 기존 법률은 전부 효력을 유지했고, 판사와 관료는 그대로 자리를 지켰다. 왕정기에 임명된 인사를 일괄 교체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남은 문제
출범 시점에 공화국이 안고 있던 문제는 적지 않았다.
- 남부 고지 — 군정이 1886년 6월까지 이어졌고, 지역 경제는 한 세대가 지나도록 회복되지 못했다. 두 문항 모두에서 반대가 우세했던 이 지역이 공화국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왕당파 전통 — 소수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았다. 대륙에 남은 린데나우가 분가들은 오늘날까지 왕위 요구자의 지위를 자처하고 있으나, 그 주장이 루이나 정치에서 실질적 의미를 가진 적은 없다
- 상징의 공백 — 510년간 국가를 대표해 온 것이 사라진 자리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는 오랜 과제였다. 오늘날 루이나의 국가 의례가 유독 헌법과 문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이 시기에 형성된 성격이다
12. 영향 [편집]
12.1. 정치 [편집]
왕정의 종식과 그 방식
계승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왕정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끝난 방식에 있다. 루이나의 왕정은 혁명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외세에 의해 폐지되지도 않았으며, 국왕이 처형당하지도 않았다. 1372년에 왕관을 준 것과 같은 형식의 회의가 같은 장소에서 왕관을 거두어들였다.
이 방식은 이후 루이나 정치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 나라가 내놓는 답은 언제나 "주어진 것"이며, 주어진 것이므로 조건을 붙일 수 있고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는 관념이 여기서 확립되었다. 1988년 1.10 민주화 선언 당시 시민 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에도 1885년의 논리가 인용되었다.
제1공화국의 성격
1885년 헌법은 왕을 없앤 자리에 다른 강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경계로 가득했다. 대통령의 권한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 국정 운영은 의회와 내각이 담당했다. 이 구조는 36년간 유지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경험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1921년 제2공화국 헌법에서 행정부 권한 확대로 수정되었다.
한편 제3조가 규정한 세습 직위 금지의 개정 불가 조항은 이후 루이나 헌법 전통의 특징이 되었다. 1989년 제6공화국 헌법이 대통령 연임 제한을 "어떠한 개헌 절차로도 변경할 수 없는 영구 조항"으로 명시한 것도 이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정당 구도의 재편
전쟁은 기존 정당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왕당파와 연루된 보수 정파는 사실상 소멸했고, 그 공백은 두 갈래로 메워졌다. 하나는 전쟁을 이끈 온건파가 중심이 된 자유주의 계열, 다른 하나는 도시 노동자와 비국교회 기반의 급진 계열이었다. 이 구도는 1900년대 노동 정당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왕당파 전통은 소수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았다. 남부 고지와 서부 내륙의 일부 선거구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며, 1890년대까지 하원에서 열 석 안팎을 확보했다. 다만 이들의 강령은 왕정 복고가 아니라 지역 자치 확대로 옮겨 갔다. 헌법 제3조가 복고를 원천 봉쇄한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정권 문제
1885년 국민투표의 선거권이 남성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제1공화국 성립의 한계로 오래 지적되었다. 전쟁 기간 여성들이 구호와 생산에 대규모로 동원되었음에도 새 헌법은 참정권을 확대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여성 참정권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보통선거가 도입된 것은 1921년 제2공화국 헌법에 이르러서였다.
계승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왕정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끝난 방식에 있다. 루이나의 왕정은 혁명으로 무너지지 않았고, 외세에 의해 폐지되지도 않았으며, 국왕이 처형당하지도 않았다. 1372년에 왕관을 준 것과 같은 형식의 회의가 같은 장소에서 왕관을 거두어들였다.
이 방식은 이후 루이나 정치 문화의 근간이 되었다. 권력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 나라가 내놓는 답은 언제나 "주어진 것"이며, 주어진 것이므로 조건을 붙일 수 있고 거두어들일 수도 있다는 관념이 여기서 확립되었다. 1988년 1.10 민주화 선언 당시 시민 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에도 1885년의 논리가 인용되었다.
제1공화국의 성격
1885년 헌법은 왕을 없앤 자리에 다른 강자를 들이지 않겠다는 경계로 가득했다. 대통령의 권한은 극도로 제한되었고, 실질적 국정 운영은 의회와 내각이 담당했다. 이 구조는 36년간 유지되다가 제1차 세계대전의 총력전 경험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1921년 제2공화국 헌법에서 행정부 권한 확대로 수정되었다.
한편 제3조가 규정한 세습 직위 금지의 개정 불가 조항은 이후 루이나 헌법 전통의 특징이 되었다. 1989년 제6공화국 헌법이 대통령 연임 제한을 "어떠한 개헌 절차로도 변경할 수 없는 영구 조항"으로 명시한 것도 이 전통의 연장선에 있다.
정당 구도의 재편
전쟁은 기존 정당 구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왕당파와 연루된 보수 정파는 사실상 소멸했고, 그 공백은 두 갈래로 메워졌다. 하나는 전쟁을 이끈 온건파가 중심이 된 자유주의 계열, 다른 하나는 도시 노동자와 비국교회 기반의 급진 계열이었다. 이 구도는 1900년대 노동 정당이 등장할 때까지 이어졌다.
왕당파 전통은 소수 정치 세력으로 살아남았다. 남부 고지와 서부 내륙의 일부 선거구에서 명맥을 유지했으며, 1890년대까지 하원에서 열 석 안팎을 확보했다. 다만 이들의 강령은 왕정 복고가 아니라 지역 자치 확대로 옮겨 갔다. 헌법 제3조가 복고를 원천 봉쇄한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참정권 문제
1885년 국민투표의 선거권이 남성에 한정되었다는 사실은 제1공화국 성립의 한계로 오래 지적되었다. 전쟁 기간 여성들이 구호와 생산에 대규모로 동원되었음에도 새 헌법은 참정권을 확대하지 않았고, 이는 이후 수십 년간 여성 참정권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보통선거가 도입된 것은 1921년 제2공화국 헌법에 이르러서였다.
12.2. 군사 [편집]
육군의 재편과 불신
내전에서 육군은 왕당파의 주력이었다. 개전 시점에 왕당파에 가담한 정규 육군은 약 5만 2천 명으로 의회 측의 두 배가 넘었고, 육군 남부·서부 관구는 사실상 통째로 반대편에 섰다.
이 기억이 1885년 헌법 제19조와 제20조를 낳았다. 의회 동의 없는 상비군 증강 금지, 군의 정치 관여 금지, 현역 군인의 공직 취임 금지가 헌법에 명문화된 것은 유럽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후 육군은 대대적으로 재편되었다. 왕당파에 가담한 관구는 해체되었고, 장교단의 3분의 1 이상이 퇴역하거나 면직되었다. 새 편제는 지역 관구제를 폐지하고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짜였는데, 이는 지역 부대가 지역 유력자에게 종속되는 구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해군의 위상
반대로 해군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전쟁의 승부를 가른 것이 해군이었고, 해군 장교단은 거의 전원이 개전 시점에 의회 편에 섰다. 이후 루이나에서 해군은 공화국을 지킨 군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으며, 예산 배분과 인사에서 육군에 대한 우위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만 이 위상에는 그늘이 있었다. 에드거 몰리뉴가 집행한 남부 고지 봉쇄가 민간인 대량 아사를 낳았다는 사실이 20세기 중반 이후 재조명되면서, 해군의 전쟁 서사는 다시 검토되기 시작했다.
1978년과의 연결
1885년에 세워진 문민 통제 원칙은 93년간 지켜졌다. 그것이 무너진 것이 1978년 10.10 군사반란이다. 이 사건이 루이나 사회에 그토록 큰 충격을 준 것은 단순히 쿠데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계승전쟁 이후 이 나라가 세운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정면으로 짓밟혔기 때문이었다.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 헌법이 군의 정치 개입 금지를 다시 명문화한 것도 1885년의 조항을 복원한 성격이 강하다.
내전에서 육군은 왕당파의 주력이었다. 개전 시점에 왕당파에 가담한 정규 육군은 약 5만 2천 명으로 의회 측의 두 배가 넘었고, 육군 남부·서부 관구는 사실상 통째로 반대편에 섰다.
이 기억이 1885년 헌법 제19조와 제20조를 낳았다. 의회 동의 없는 상비군 증강 금지, 군의 정치 관여 금지, 현역 군인의 공직 취임 금지가 헌법에 명문화된 것은 유럽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전후 육군은 대대적으로 재편되었다. 왕당파에 가담한 관구는 해체되었고, 장교단의 3분의 1 이상이 퇴역하거나 면직되었다. 새 편제는 지역 관구제를 폐지하고 중앙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짜였는데, 이는 지역 부대가 지역 유력자에게 종속되는 구조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해군의 위상
반대로 해군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높아졌다. 전쟁의 승부를 가른 것이 해군이었고, 해군 장교단은 거의 전원이 개전 시점에 의회 편에 섰다. 이후 루이나에서 해군은 공화국을 지킨 군이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었으며, 예산 배분과 인사에서 육군에 대한 우위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다만 이 위상에는 그늘이 있었다. 에드거 몰리뉴가 집행한 남부 고지 봉쇄가 민간인 대량 아사를 낳았다는 사실이 20세기 중반 이후 재조명되면서, 해군의 전쟁 서사는 다시 검토되기 시작했다.
1978년과의 연결
1885년에 세워진 문민 통제 원칙은 93년간 지켜졌다. 그것이 무너진 것이 1978년 10.10 군사반란이다. 이 사건이 루이나 사회에 그토록 큰 충격을 준 것은 단순히 쿠데타였기 때문이 아니라, 계승전쟁 이후 이 나라가 세운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 정면으로 짓밟혔기 때문이었다. 민주화 이후 제6공화국 헌법이 군의 정치 개입 금지를 다시 명문화한 것도 1885년의 조항을 복원한 성격이 강하다.
12.3. 사회와 경제 [편집]
인구와 노동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군인 약 4만 3천 명, 민간인은 추정에 따라 편차가 크나 1만 7천 명 안팎으로 본다. 절대 수치는 동시대 유럽의 대규모 전쟁에 비하면 크지 않으나, 인구 대비로는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분포가 극단적으로 불균등했다. 사망자의 다수가 남부 고지와 접경 지역에 집중되었다.
내해 연안 공업 지대는 오히려 전쟁 기간에 성장했다. 군수 수요가 조선업과 철강, 기계 제조를 끌어올렸고, 전후에도 이 설비는 유휴화되지 않았다. 1880년대 후반 루이나의 중공업이 빠르게 확장한 배경에는 이 전시 수요가 있었다.
자본과 금융
전쟁은 벨포르 금융권의 위상을 강화했다. 의회파가 전비를 국채로 조달했고, 그 국채를 인수한 것이 벨포르의 은행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이들 은행은 공화국 재정의 핵심 파트너가 되었으며, 왕실 채무 처리 과정에서 대륙 은행들이 손실을 본 것과 대비되었다.
반면 왕실과 연결되어 있던 토지 자본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왕당파에 가담한 대지주 47명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이 토지는 이후 분할 매각되었다. 이는 남부 고지와 서부 내륙의 토지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지역 전통 귀족층의 정치적 기반을 소멸시켰다.
교회
1885년 헌법 제44조에 따라 루이나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었다. 국왕이 겸하던 총관직이 소멸하면서 교회는 자체 총회를 구성했고, 이는 1531년 레온하르트 2세가 로마 교회와 결별한 이래 354년 만에 교회가 세속 권력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전쟁 중 고교회파가 왕당파의 핵심이었던 만큼 전후 교회 내부의 권력 이동도 컸다. 고교회파 성직자 다수가 면직되거나 스스로 물러났고, 그 자리를 저교회파와 광교회파가 채웠다. 남부 고지 장로회는 별도 교단으로서 지위를 유지했으나 지역 자체가 황폐해진 탓에 교세가 크게 줄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은 군인 약 4만 3천 명, 민간인은 추정에 따라 편차가 크나 1만 7천 명 안팎으로 본다. 절대 수치는 동시대 유럽의 대규모 전쟁에 비하면 크지 않으나, 인구 대비로는 적지 않았고 무엇보다 분포가 극단적으로 불균등했다. 사망자의 다수가 남부 고지와 접경 지역에 집중되었다.
내해 연안 공업 지대는 오히려 전쟁 기간에 성장했다. 군수 수요가 조선업과 철강, 기계 제조를 끌어올렸고, 전후에도 이 설비는 유휴화되지 않았다. 1880년대 후반 루이나의 중공업이 빠르게 확장한 배경에는 이 전시 수요가 있었다.
자본과 금융
전쟁은 벨포르 금융권의 위상을 강화했다. 의회파가 전비를 국채로 조달했고, 그 국채를 인수한 것이 벨포르의 은행들이었기 때문이다. 전후 이들 은행은 공화국 재정의 핵심 파트너가 되었으며, 왕실 채무 처리 과정에서 대륙 은행들이 손실을 본 것과 대비되었다.
반면 왕실과 연결되어 있던 토지 자본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왕당파에 가담한 대지주 47명의 재산이 몰수되었고, 이 토지는 이후 분할 매각되었다. 이는 남부 고지와 서부 내륙의 토지 소유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으며, 결과적으로 이 지역 전통 귀족층의 정치적 기반을 소멸시켰다.
교회
1885년 헌법 제44조에 따라 루이나 교회는 국가와 분리되었다. 국왕이 겸하던 총관직이 소멸하면서 교회는 자체 총회를 구성했고, 이는 1531년 레온하르트 2세가 로마 교회와 결별한 이래 354년 만에 교회가 세속 권력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전쟁 중 고교회파가 왕당파의 핵심이었던 만큼 전후 교회 내부의 권력 이동도 컸다. 고교회파 성직자 다수가 면직되거나 스스로 물러났고, 그 자리를 저교회파와 광교회파가 채웠다. 남부 고지 장로회는 별도 교단으로서 지위를 유지했으나 지역 자체가 황폐해진 탓에 교세가 크게 줄었다.
12.4. 남부 고지의 장기 침체 [편집]
직접 피해
남부 고지는 전쟁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전장이었다. 1883년 3월 왕당파의 결집지였고, 그해 겨울 봉쇄로 기근을 겪었으며, 1884년 여름 의회군의 진격로였고, 1885년 2월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인구 감소는 약 9%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사망만을 계산한 것이며, 전후 이주까지 포함하면 실제 인구 손실은 훨씬 컸다. 1885년 이후 10년간 남부 고지에서 내해 연안 공업 도시로 이주한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이주자 다수가 청년층이었다.
구조적 침체
침체가 길어진 것은 전쟁 피해 자체보다 그 피해가 회복될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부 고지는 전쟁의 거의 모든 국면에서 전장이었다. 1883년 3월 왕당파의 결집지였고, 그해 겨울 봉쇄로 기근을 겪었으며, 1884년 여름 의회군의 진격로였고, 1885년 2월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다.
인구 감소는 약 9%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수치는 사망만을 계산한 것이며, 전후 이주까지 포함하면 실제 인구 손실은 훨씬 컸다. 1885년 이후 10년간 남부 고지에서 내해 연안 공업 도시로 이주한 인구는 수만 명에 이르렀고, 이주자 다수가 청년층이었다.
구조적 침체
침체가 길어진 것은 전쟁 피해 자체보다 그 피해가 회복될 조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 토지 자본이 몰수·분할되면서 대규모 투자의 주체가 사라졌다
- 청년층 이주로 노동력이 빠져나갔다
- 공화국 정부의 재건 투자는 내해 연안 산업 지대에 집중되었다
- 이 지역이 국민투표에서 반대 우세를 보인 정치적 배경도 투자 우선순위에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있다
그 결과 남부 고지는 20세기 내내 루이나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남았다. 오늘날 벨포르와 남부 항만 도시 사이의 경제적 격차가 자주 지적되는데, 그 격차의 기원 가운데 하나가 1883년의 겨울이다.
기억과 정체성
경제적 침체보다 오래 남은 것은 정서적 거리였다. 남부 고지에서 이 전쟁은 헌정 투쟁이 아니라 벨포르가 이 땅을 굶겨 죽인 일로 기억되었고, "굶주린 겨울"이라는 표현이 구전으로 전해졌다. 공화국의 공식 서사와 이 지역의 기억 사이의 간극은 20세기 중반까지 거의 좁혀지지 않았다.
1709년 합병법으로 왕국에 병합된 이래 남부 고지는 언제나 반쯤 바깥에 있는 지역이었고, 계승전쟁은 그 거리를 좁히기는커녕 결정적으로 벌려 놓았다. 이 지역이 공화국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는 두 세대 이상이 걸렸다.
12.5. 왕실 재산과 상징의 처리 [편집]
재산
1885년 8월 「왕실 재산 처리에 관한 법」에 따라 왕실 사유 재산 일체가 국유화되었다. 처리 방식은 용도에 따라 갈렸다.
1885년 8월 「왕실 재산 처리에 관한 법」에 따라 왕실 사유 재산 일체가 국유화되었다. 처리 방식은 용도에 따라 갈렸다.
- 윈드미어 궁 — 국립박물관으로 전용. 대통령 관저로 쓰자는 안이 제기되었으나 왕이 살던 곳에 국가원수를 들이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부결되었다
- 벨포르 왕궁 — 의회 부속 시설과 국가 기록보존소로 전용
- 카엘몬트 성 — 전쟁으로 크게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20년대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 왕실 보석과 대관 의물 — 매각하지 않고 국립박물관에 일괄 보관. 매각론이 있었으나 "팔면 언젠가 누가 다시 사 올 것"이라는 반대에 막혔다
상징
왕실 문장은 국가 상징에서 제외되었으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벨포르 대성당과 옛 왕궁 건물의 조각과 부조, 스테인드글라스는 그대로 남았고, 이는 의도적인 결정이었다. 1647년 호국공 체제가 왕실 문장을 새긴 인장과 주형을 파괴했다가 12년 뒤 전부 되돌려야 했던 전례가 이 결정의 배경으로 거론된다.
새 국장은 1887년 제정되었다. 국기는 왕실 색인 뽕나무빛을 제외하고 남색과 금색을 기본으로 삼았다.
대관 의물의 처리
가장 상징적인 조치는 왕관에 관한 것이었다. 1885년 12월 의회는 대관용 왕관을 국립박물관에 보관하되, 전시할 때 받침대 없이 눕혀 놓을 것을 결의했다. 세워서 전시하면 언젠가 쓰일 물건처럼 보인다는 이유였다.
이 결의는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루이나 국립박물관의 왕관은 지금도 눕혀진 채 전시되어 있으며, 이 전시 방식 자체가 1885년의 결정을 설명하는 안내문과 함께 소개된다.
왕실 묘소
벨포르 대성당의 왕실 묘소와 윈드미어 왕실 영묘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장이나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관리 책임만 국가로 이관되었다. 에드먼드 3세는 윈드미어 영묘에 어머니 아멜리아 1세 곁에 안장되어 있으며, 루이나 국왕 가운데 마지막으로 이곳에 묻힌 인물이다.
13. 평가 [편집]
13.1. 불가피했는가 [편집]
계승전쟁이 피할 수 있는 전쟁이었는가는 이 사건을 다루는 연구에서 가장 오래된 물음이다. 논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① 구조적 불가피론
가장 오래된 견해다. 1882년의 위기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루이나 헌정 질서에 내재한 결함이 드러난 것이며, 그 결함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 같은 사태가 벌어졌으리라는 주장이다.
근거는 명확하다. 이 나라에는 국왕 부재 시 대권의 소재를 정한 규정이 없었다. 1372년 이래 510년 동안 왕위가 완전히 비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만들지 않았다. 1647년의 공백은 국왕을 처형한 뒤였으므로 애초에 왕정 자체가 정지된 상태였고, 1689년의 공백은 후계자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82년은 왕정이 존속하는 상태에서 왕위만 비고 후계자도 없는 최초의 사례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델하이트는 결함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결함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을 것이며, 다만 시점과 인물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② 회피 가능론
20세기 중반 이후 제기된 반론이다. 이 견해는 위기가 구조적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되, 전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지적되는 분기점은 여러 개다. 1880년과 1881년에 발의되었다가 철회된 계승 순위 확정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1882년 8월 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하지 않고 판단을 내렸다면. 왕위계승특별위원회가 아델하이트의 옵서버 출석을 허용했다면. 1883년 2월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 제4항이 대권의 정지를 그토록 단정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면.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위원회의 옵서버 출석 부결이다. 왕비가 계승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 그를 체제 밖으로 밀어냈다는 지적으로, 이 결정 이후 왕비가 위원회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은 당대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③ 양측 책임 분산론
가장 최근의 견해로, 어느 한쪽의 결정을 분기점으로 지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다. 1882년 4월부터 1883년 3월까지 11개월 동안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있는 지점이 여러 번 있었으나, 매번 상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근거로 더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사법부의 분열이다. 1883년 2월 12일 두 개의 법원이 서로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한 시점에서, 이 사태는 이미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이후의 무력 충돌은 결정이라기보다 결과였다는 것이다.
종합
오늘날 통설은 ①과 ③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 위기 자체는 구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3년 내전으로 번진 것은 여러 우발적 선택이 겹친 결과이며, 특히 1882년 가을부터 1883년 초까지의 짧은 기간에 결정적 분기점이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견해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15년간 후사가 없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음에도 왕실과 의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작위는 어떤 해석으로도 변호되지 않는다.
① 구조적 불가피론
가장 오래된 견해다. 1882년의 위기는 우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루이나 헌정 질서에 내재한 결함이 드러난 것이며, 그 결함이 존재하는 한 언젠가 같은 사태가 벌어졌으리라는 주장이다.
근거는 명확하다. 이 나라에는 국왕 부재 시 대권의 소재를 정한 규정이 없었다. 1372년 이래 510년 동안 왕위가 완전히 비었던 적이 없었으므로 그 규정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만들지 않았다. 1647년의 공백은 국왕을 처형한 뒤였으므로 애초에 왕정 자체가 정지된 상태였고, 1689년의 공백은 후계자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1882년은 왕정이 존속하는 상태에서 왕위만 비고 후계자도 없는 최초의 사례였다.
이 견해에 따르면 아델하이트는 결함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결함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을 것이며, 다만 시점과 인물이 달랐을 뿐이라는 것이다.
② 회피 가능론
20세기 중반 이후 제기된 반론이다. 이 견해는 위기가 구조적이었다는 점은 인정하되, 전쟁까지 갈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
지적되는 분기점은 여러 개다. 1880년과 1881년에 발의되었다가 철회된 계승 순위 확정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1882년 8월 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하지 않고 판단을 내렸다면. 왕위계승특별위원회가 아델하이트의 옵서버 출석을 허용했다면. 1883년 2월 「왕위 계승에 관한 결의」 제4항이 대권의 정지를 그토록 단정적으로 선언하지 않았다면.
이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위원회의 옵서버 출석 부결이다. 왕비가 계승 논의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이 그를 체제 밖으로 밀어냈다는 지적으로, 이 결정 이후 왕비가 위원회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은 당대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③ 양측 책임 분산론
가장 최근의 견해로, 어느 한쪽의 결정을 분기점으로 지목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는다. 1882년 4월부터 1883년 3월까지 11개월 동안 양측 모두 물러설 수 있는 지점이 여러 번 있었으나, 매번 상대의 다음 행동을 예측하고 그것을 근거로 더 나아가는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사법부의 분열이다. 1883년 2월 12일 두 개의 법원이 서로를 체포하라는 영장을 발부한 시점에서, 이 사태는 이미 법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 이후의 무력 충돌은 결정이라기보다 결과였다는 것이다.
종합
오늘날 통설은 ①과 ③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 위기 자체는 구조적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것이 3년 내전으로 번진 것은 여러 우발적 선택이 겹친 결과이며, 특히 1882년 가을부터 1883년 초까지의 짧은 기간에 결정적 분기점이 몰려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어느 견해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다. 15년간 후사가 없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음에도 왕실과 의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부작위는 어떤 해석으로도 변호되지 않는다.
13.2. 1689년 왕위협약의 책임 [편집]
아델하이트는 재판에서 잘못이 있다면 계승권을 박탈하지 않은 1689년 의회의 잘못이라고 항변했다. 국사재판소는 이를 배척했으나, 이 항변이 제기한 문제 자체는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논의된다.
사실관계
1689년 의회는 제이머스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국왕이 통치를 포기하여 왕위가 비었다는 법리를 택했고, 그 결과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조항을 두지 않았다.
이 선택의 이유는 분명하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해 처형한 기억 때문이었다. 국왕을 심판하는 절차를 다시 밟으면 왕정 자체가 흔들린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심판 대신 사실 확인의 형식을 택한 것이다.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신중한 처리였다.
책임을 인정하는 견해
이 견해는 1689년의 신중함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미룬 것이었다고 본다. 왕위협약은 눈앞의 위기는 넘겼으나 그 대가로 소멸하지 않은 청구권을 남겼고, 193년 뒤 그 청구권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드는 방증은 1745년 봉기다. 망명 계열의 후손이 남부 고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 문제는 한 번 드러났으며,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의회는 계승권 박탈을 명문화하지 않았다. 기회는 있었으나 쓰지 않은 셈이다.
책임을 부정하는 견해
반론은 두 갈래다.
첫째, 법률적으로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국사재판소가 판시한 대로, 1711년 개신교 계승법이 계승 순위를 새로 확정하면서 열거되지 않은 계열의 청구권은 대체되었다. 뮈롱의 청구권은 1689년에 박탈되지 않았을 뿐 1711년에 소멸했으므로, 빈틈은 22년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둘째, 빈틈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난 것이 아니다. 아델하이트가 뮈롱을 찾아낸 것은 계승 논의가 교착되었기 때문이지 빈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빈틈이 없었다면 다른 명분을 찾았으리라는 것이다.
소수의견의 재평가
이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아델하이트 재판의 소수의견이다. 재판관 헨리 콜빌은 다수의견의 계승권 판단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사실관계
1689년 의회는 제이머스 2세를 폐위한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국왕이 통치를 포기하여 왕위가 비었다는 법리를 택했고, 그 결과 계승권을 명시적으로 박탈하는 조항을 두지 않았다.
이 선택의 이유는 분명하다. 1647년 카렐 1세를 재판해 처형한 기억 때문이었다. 국왕을 심판하는 절차를 다시 밟으면 왕정 자체가 흔들린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심판 대신 사실 확인의 형식을 택한 것이다.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대단히 신중한 처리였다.
책임을 인정하는 견해
이 견해는 1689년의 신중함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미룬 것이었다고 본다. 왕위협약은 눈앞의 위기는 넘겼으나 그 대가로 소멸하지 않은 청구권을 남겼고, 193년 뒤 그 청구권이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견해가 드는 방증은 1745년 봉기다. 망명 계열의 후손이 남부 고지에서 봉기를 일으켰을 때 이미 이 문제는 한 번 드러났으며, 봉기가 진압된 뒤에도 의회는 계승권 박탈을 명문화하지 않았다. 기회는 있었으나 쓰지 않은 셈이다.
책임을 부정하는 견해
반론은 두 갈래다.
첫째, 법률적으로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국사재판소가 판시한 대로, 1711년 개신교 계승법이 계승 순위를 새로 확정하면서 열거되지 않은 계열의 청구권은 대체되었다. 뮈롱의 청구권은 1689년에 박탈되지 않았을 뿐 1711년에 소멸했으므로, 빈틈은 22년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둘째, 빈틈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난 것이 아니다. 아델하이트가 뮈롱을 찾아낸 것은 계승 논의가 교착되었기 때문이지 빈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며, 빈틈이 없었다면 다른 명분을 찾았으리라는 것이다.
소수의견의 재평가
이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것이 아델하이트 재판의 소수의견이다. 재판관 헨리 콜빌은 다수의견의 계승권 판단에 반대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다수의견은 1711년 법이 1689년의 빈틈을 메웠다고 하나, 그렇다면 1882년에 그 답이 이토록 어려웠을 리 없다.
이 지적은 오랫동안 소수의견으로 묻혀 있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재조명되었다. 1882년 왕위계승특별위원회가 여섯 달을 논의하고도 결론을 내지 못했고 대법원이 심리를 거부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법률 체계가 이 문제에 명확한 답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평가
현재는 1689년에 전적인 책임을 지울 수는 없으나 그 선택이 조건을 만든 것은 사실이라는 절충적 평가가 일반적이다. 이 논쟁이 갖는 의미는 책임 소재를 가리는 데 있다기보다, 헌정 위기를 절차적 우회로 넘기는 방식이 어떤 대가를 남기는지를 보여 주는 사례로서 반복 인용된다는 데 있다. 1988년 개헌 논의에서도 이 사례가 언급되었다.
